1099년 오늘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두고는 역사왜곡이 없지 않다.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다거나 잘못 쓰여져 있다는 말이 아니다. 기록은 제대로 돼 있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왜곡된 셈이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기록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만 했지 그들이 그 안의 이슬람교도들은 물론 유대교도들까지 깡그리 죽인 사실은 잘 들추지 않고 있다. 사람이 너무 죽어 성안에서 피가 무릎까지 질퍽했다는 이야기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것은 별로 아쉽지 않다. 그 자체가 왜곡된 이야기여서다. 사람의 몸은 가죽주머니와 다르고 그 안의 피도 붉은 잉크와는 다른 것 아닌가.
그러나 십자군이 어린이나 부녀자 등을 7만 명이나 죽였다는 이야기는 분명한 사실이다. 유대교 성전에 피신한 부녀자들과 어린이 200명을 성전과 함께 불태운 것도 사실이다. 십자군들은 저항도 못하는 이들을 그냥 죽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로부터 “이슬람교도들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 축복 받을만한 행복”이라고 들었기에 사람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일수록 희열에 차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들였다.
십자군의 성전에 빼앗긴 성도는 한 세기 가까이 지난 뒤인 1187년 이슬람의 전설적인 영웅 살라딘이 역시 ‘성전’(지하드)으로 다시 탈환한다. 따라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성스러운 성전(聖殿)의 도시이자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 성전(聖戰)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 가나안 사람들이 처음 세울 때의 ‘우루살림’(평화의 도시)이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2000년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 이어 로마에게도 침공을 받았는가 하면 바로 십자군 원정의 구실(성지 탈환)이 되기도 했다. 그 바람에 빼앗긴 이 성을 살라딘이 되찾은 뒤에도 예루살렘의 피비린내는 가시지 않은데다 지난날 십자군에게 함께 피해를 당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 간에 성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마련한 로드맵(중동평화계획)도 이슬람교도들의 지하드를 얼마나 억제하는 가에 성패가 걸려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문제는 그것을 추진하는 미국의 부시 자신이 공정한 중재자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축’이라는 발언이 그렇듯 지난날의 십자군처럼 ‘성전’을 벌이는 냄새를 풍기는 점이다. 그리고 최근 국내서 출판된 미국 언론인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은 십자군의 ‘성전’이 도발적이고 침략적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 이슬람의 전설적 영웅 살라딘은 제3차 십자군의 침공을 맞아 어쩔 수 없어 방어적인 성전을 폈으나 포로의 생명까지 철저히 아끼는 인도주의자로 나온다. 이에 반해 그의 상대역으로써 십자군의 상징적 영웅인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는 출중한 미남에다 시인이기도 했으나 허장성세가 심한데다 교활한 인간으로 비친다.
하필이면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이니 ‘악의 축’과의 전쟁이니 하며 새로운 ‘성전’의 나팔을 불고 있을 때 그런 책이 나옴으로써 부시의 얼굴은 사자왕 리차드의 그것과 오버랩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얼핏 미국의 언론인 레스턴은 이적행위를 한 셈이 됐으나 자세히 보면 그는 세계적 언론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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