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오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은 이제 우리가 ‘시상’에 잠겨 회상할 수 있다. 시는 천상병(千祥炳)의 ‘그 날은’이 제격이다.
“그 날은/ 이제 몇 년이었던가/ 아이론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 날은// 이제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 창가에 여름곤충 한 마리/ 땀흘리는 나에게 악수 청한 그 날은// …”
새삼 ‘귀천’(歸天)한 시인의 시를 들먹인 것은 그가 사건의 주범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막상 동베를린에 간 적도 없는 피라미 급 ‘범인’이었다. 그래서 당시 1심에서 2명이 사형, 4명이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을 때 1년형을 선고받아 6개월의 형을 살았다. 천상병이 당시 검거된 194명 가운데 이름난 명사여서도 아니다. 당시 연루된 인사들 가운데는 음악가 윤이상이나 화가 고암 이응로처럼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이들이 수두룩했다.
당시 천상병도 문단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알려져 있었으나 아직 시집 한 권 내놓지 않은 그가 이름을 떨친 것은 시인으로서가 아니었다. 술꾼 기인 괴물 흉물 광인 걸인… 등으로였다. 걸인 같은 차림에 아는 사람만 만나면 술값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으니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던 그가 지을 수 있는 죄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런 천상병이 ‘아이론밑 와이샤쓰같이’ 전기고문을 당한 것은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에서 헌 와이셔츠만도 못한 사건일 수 있으나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새일 수도 있다.
천상병이 걸려든 것은 그의 대학동창(서울 상대)으로 당시 모교 교수로 있던 친구 강빈구(姜濱口) 때문이었다. 부자집 아들로 바이얼린 연주를 즐기던 강빈구는 천상병과는 딴 계층이었으나 같은 ‘낭만주의자’로 친했기에 사건 며칠 전인 6월 25일까지 자주 만나 술을 사준 것이 독주가 되고 말았다.
천상병은 “동인(강빈구)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으로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공포감을 갖게 한 뒤에 수십 차례에 걸쳐 1백원에서 6천5백원씩 도합 5만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은” 죄로 걸려든 것이다.
천상병과 간첩단 사건-. 그것은 너무 어울리지 않으나 그래서 또 어울릴 수도 있다. 천상병이 명문대를 중퇴한 것에서부터 걸인처럼 산 것도 ‘위장’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다. 그러나 천상병의 본색을 조금만 살폈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위장 여부를 추궁하려면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 강빈구가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었던 시절부터 따졌어야 했다. 천상병이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하숙하면서 한무숙의 화장품을 양주로 알고 마셨다는 이야기는 꽤 알려져 있었으니 그 때부터 그는 본색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가 간첩혐의자를 수십 차례나 협박했다는 말이나 그래서 1백원씩도 갈취했다는 말도 술꾼들의 허튼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 웃음이 나온다. 그런 주정꾼 친구에게 동베를린에 갔다는 기밀을 별 생각 없이 털어 논 강빈구가 동베를린에서 공작교육을 받았다는 말도 썰렁했으나 그래서 한결 오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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