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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의 외국인들/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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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의 외국인들/7월 7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56>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이 시를 아는가. ‘나환자 시인 한하운(韓何雲)’을 아는 이가 줄어가듯 그의 ‘보리피리'를 아는 이도 갈수록 줄고 있으나 섭섭하지는 않다. 그것은 원래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시였고 어쩔 수 없이 지어졌다면 빨리 잊혀져야할 시다.

다행히 한하운이 세상을 떠난 1975년 무렵부터는 어린아이들이 나환자에게 쫓기는 꿈에 잠을 설치는 일이 없어지면서 ‘보리피리’소리도 멀어지고 있다. 이제 어린이들은 ‘나병’이라는 말도 잘 모른 채 이따금 ‘한센병’이라는 의학용어를 신문 같은 데서 읽을 뿐이다.

그러나 1933년 오늘 소록도의 나병촌이 완공될 때는 ‘한센병’이라는 말이 없었고 대신 ‘나환자’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살아 있었다. 영화 ‘벤허’나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나병촌은 한하운의 시를 빌자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환의 거리’에서 쫓겨난 환자들을 모아 스스로 그런 거리를 만들어 나름의 ‘인간사’를 누리게 하는 것이니 반가운 일이나 우리로써는 부끄러운 데가 없지 않다. 소록도 나병촌의 역사에서 외국인들의 발자국이 너무 선명한데 비해 우리의 그것이 너무 약해 보여서다.

소록도 자혜병원이 1916년 메이치 천황의 하사금으로 세워진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혜병원의 전신이 그 6년 전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시립 나요양원’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도 아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마당에 그런데 정신을 기울일 수는 없다해도 병원이 완공된 뒤에도 우리 사회가 무관심한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제하에서 총독들이 평균 10년에 한번 꼴로 그곳을 찾은 데 비해 2000년 이희호 여사가 그곳을 방문하자 ‘소록도 84년의 첫 경사’라고 한 데는 어딘지 경사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다. 총독들이 그곳은 찾은 것은 식민정책의 일환이라 쳐도 ‘통치의 일환’으로라도 그곳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을 떠나서 소록도 병원에서 외국인들이 보여준 희생도 우리에게는 고마운 한편으로 부끄럽다. 자혜병원의 제2대 원장(1921-29)인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의 창덕비는 한국에서 가장 눈물겹고 그래서 가장 진실한 비석의 하나다.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원생들과 동고동락하던 그가 현지에서 순직하자 ‘하나이 원장 창덕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원생들이 성치 않은 손으로 80원을 모아서 세운 것이다.

원생들의 불편한 손은 그 뒤에도 바빴다. 자유당 시절 일제청산의 일환으로 비석을 폐기하려 하자 비석을 땅에 묻었다가 훗날 다시 세워야 했다. 당시 서울 거리에도 득시글거리던 일제 잔재를 두고 먼 남쪽 섬의 비석에까지 신경을 쓴 것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녀 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 등 세 수녀를 기념하는 ‘삼마 공적비’도 소록도에 남긴 외국인의 발자취다.

물론 한국인 가운데서도 소록도나 다른 곳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이들은 많다. 다만 한센병과는 달리 전염성도 없는 정박아 시설 같은 것이 들어서려 해도 주민들이 반대하는 풍토에서 그들의 희생이 너무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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