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당’을 아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귀찮다는 표정일 것이다. 십중팔구는 광복 직후 남북한을 가릴 것 없이 생겨났다 사라진 수많은 정당 가운데 하나일 텐데 그게 새삼 어떻다는 거냐는 얼굴일 게 뻔하다.
따라서 그 당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전신이라고 하면 더러는 놀라고 더러는 미치광이를 보는 듯할 것도 짐작할 만하다. 지금까지 상하이 임정은 좌파적인 색채가 짙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달리 우파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7년 8월 상하이에서 조선사회당이 결성돼 스톡홀름의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 대표를 파견했고 그 관계자들이 2년 뒤에 임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새삼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통념과는 달리 3.1운동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서다. 상하이 임정은 오랜 잉태과정을 거치다가 3.1운동으로 출산했고 그 잉태과정에서도 이처럼 국제대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 조선사회당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급조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에 뿌리를 둔 셈이다. 조선사회당의 모체는 1912년 오늘 상하이에서 결성된 동제사(同濟社)로서 그 산파역이자 이사장인 예관(倪觀) 신규식(申圭植)은 일찍이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구한말 무관학교를 졸업하여 부위(副尉)로 있던 신규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음독해 오른 눈을 실명했고 뒤이은 합방에 또 음독했으나 주위의 구명으로 또 살아나자 1911년 중국으로 망명, 쑨원(孫文)의 혁명을 도운 것이다.
그 혁명이 성공하자 중국에 망명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독립)에 도달하자”는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정신에 따라 동제사를 결성한 것이다. 동제사에 뒤이어 중국의 혁명지도자들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신아(新亞)동제사'를 결성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동제사가 그 이듬해 박달학원을 세워 조선청년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은 물론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시킨 것도 신규식과 쑨원의 동지적 관계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리자 동제사는 조선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를 보냈으나 거창한 창당을 거친 것이 아니라 신규식의 자택에 본부를 둔 정도였다.
한마디로 중국의 신해혁명과 그 6년 뒤의 러시아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생겨난 동제사와 그 전통을 이어받은 상하이 임정에게 ‘사회주의’는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은 단어였다. 그래서 상하이 임정이 생겨난 이듬해인 1920년 7월 31일부터 1주일간 제네바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도 임정은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 등 3개항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런 전통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46년 남한의 여론조사 결과 사회주의 지지자는 70%로 자본주의(14%)와 공산주의(7%)를 압도했다. 그러나 곧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동의어처럼 되면서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기는커녕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모양새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가 하면 지난해는 ‘붉은 악마’들이 레드 콤플렉스를 내쫓아 우리는 ‘같은 배’라도 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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