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오늘 국회서 통과된 간통죄는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나라의 “혼인제도를 유지하고 가족생활을 보호해” 왔으나 이를 말 그대로 믿는 이는 드물다. 성도덕이 문란한 요즘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아직 구시대의 성윤리가 남아 있어 은장도나 망부석이라는 말이 실없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던 그 시대에도 그랬다.
그 법이 통과된 지 2년 뒤에 일어난 ‘박인수 사건’이 그렇다. 박인수라는 해병 장교 출신이 여대생 등 70여명의 미혼여성을 농락했다가 고발당했으나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며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따라서 정조를 잃고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70명의 여성들도 대부분은 훗날 결혼했을 것이고 법은 그들의 결혼생활을 ‘유지’해 주었을 것이다.
물론 젊은 시절 탈선한 여성이라 해서 결혼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그 이유로 그들의 배우자가 탈선하는 것을 방치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문제는 그것이 당시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 드러난 것이었을 뿐이었고 그처럼 혼전의 정조를 보호할 수 없는 사회에서 결혼 이후의 부부의 금슬을 지켜주겠다고 하는 간통법이 너무 외롭고 피곤해 보이는 점이다.
일제 형법의 소산인 간통법은 원래 쌍벌죄가 아니라 여성들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단벌죄 형식이었다. 그것은 사무라이 시대부터 “배꼽 이하의 일은 묻지 않는다”는 남성우위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이나 그 점은 한국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한국의 양반사회에서 혼외정사는‘소실’이라는 점잖은 풍속도로 정착돼 있었다.
한국에서도 간통죄는 단벌죄로 도입됐으나 국회는 개인의 사생활에 법이 개입할 수 있느냐는 논쟁 끝에 한 표 차로 간신히 통과됐다. 그러다 이것이 남녀 평등이라는 헌법에 어긋난다 해서 이듬해 쌍벌죄로 바뀌었으나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육법전서에 자리잡은 간통죄는 좀체 일어설 줄을 모르는 것은 물론 입지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반세기전 한 표 차로 통과된 이 법은 90년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 사이에서 6:3으로 합헌판결을 받더니 재작년에는 8:1로 자리를 굳혔다.
물론 간통죄의 입지가 그런 수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헌법재판소 자체도 간통법의 개정 필요성을 시사했었다. 간통죄를 둘러싼 상황은 더 말할 것이 없다.
3년 전 광주의 여자 파출소장 K경위의 간통을 둘러싼 사건은 박인수 사건과는 다른 차원에서 간통죄를 강타한 셈이다. 여대생인 딸이 어머니의 간통을 인터넷에 ‘엄마의 간통’이라는 글로 고발하자 얼마 뒤에는 어머니인 K경위가 인터넷에 “친딸에게 공개 고발당한 여자의 진술서“를 올린 사건이다.
여기서 K경위는 고3때 스승이던 현재의 남편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갖고 그 딸을 낳았고 결혼 후에도 계속 폭행을 당한 것은 물론 남편은 동료 여교사나 교회의 여신도들과도 탈선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 진술이 과연 맞는지 아니면 곤경에 빠진 사람의 변명이 그렇듯 억지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런 내용이 전혀 놀랍지 않게 다가오고 그런 현실 앞에서 간통쌍벌죄가 너무 무력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바로 그래서 다른 범인을 훨씬 잘 잡아내는 선진국에서도 간통범은 잡아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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