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오늘 북한의 인민군은 삼팔선을 넘어 와 3일 뒤에는 서울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올린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1995년 오늘은 남한의 씨아펙스호가 쌀을 싣고 동해항을 떠나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하더니 2일 뒤에는 그 배에서 태극기가 내려오고 인공기가 걸린다.
씨아펙스호는 남한이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을 돕기 위해 보내기로 한 15만t의 쌀을 싣고 간 첫 번째 배였으나 북한은 쌀만이 아니라 배까지 북한 것으로 만든 모양새였다.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한달 여 뒤인 7월 31일 역시 쌀을 싣고 북한에 간 삼선비너스호의 1등 항해사가 무심코 청진항을 사진찍었다가 정탐 혐의로 몰려 배와 함께 억류됐다. 쌀과 배에 이어 사람까지 욕심낸 것 같았다.
새삼 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젊은이들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이라는 6.25의 노래를 모르는 게 안타까워 이를 환기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에도 우리는 북한에 구박을 당하며 ‘퍼주기’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사들의 사전에는 ‘퍼주기’라는 말이 없었던 사실도 상기시키고 싶다.
보수언론들이 즐겨 쓰는 ‘퍼주기’는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생겨나 햇볕정책과 거의 동의어처럼 됐다. 독자투고에서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구경하기도 힘들고 더러는 외부 기고자들도‘퍼주기’라고 한다. 그러던 판에 정상회담을 둘러싼 3억 달러 송금 사건이 불거져 ‘퍼주기’는 아예 표준어로 검증된 느낌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을 돌이켜 보면 3억 달러는 나라살림을 결단낼 만큼 엄청난 돈은 아니다. 당시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쌀 15만t도 2억 5천만 달러 어치로 비슷한 액수였다.
그것은 공개된 지원이었고 3억 달러 송금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씨아펙스호가 북한에 점령당하듯 인공기를 건 사건도 ‘우발적 사건’으로 넘어 갈 수 없는 데가 있다. 씨아펙스호에 인공기가 걸리던 그 날은 처음으로 4대 지방선거가 있었고 여기서 점수를 따기 위해 문민정부가 서둘러 쌀을 보낸 것이 발단이었다.
북한은 당시 유엔 등에 식량지원을 요청했고 일본에게는 10만t을 지원해 달라고 했으나 남한에는 그런 의사를 타진하지 않았다. 이에 선거를 앞둔 정부가 허겁지겁 요청해 6월 17일부터 21일까지 베이징에서 남북회담이 열렸으나 남북한의 관계상 협상이 쉽사리 타결되지 않은 채 선거날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씨아펙스호는 북한의 어느 항구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동해항을 떠났다니 북한 영해에서는 태극기를 걸지 않기로 한 합의사항을 알았을 리도 없었다. 삼선 비너스호의 항해사가 카메라를 들이 댄 것도 비슷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퍼주기’ 이전에 ‘빌어가며 퍼주기’도 했으나 당시의 보수언론들은 북한의 경직성을 탓했을 뿐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은 씨아펙스호의 과실이나 그런 과실이 있게 한 정책을 탓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당시 ‘황태자’가 관여했다는 보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수정권의 그런 헷갈리는 대북정책이 끝나고 진보정권이 편 남북화해 정책은 처음부터‘퍼주기’로 낙인찍혔다. 남북통일을 외치기 전에 ‘국어통일’을 서두는 것이 순서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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