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오늘 엔카 가수 미소라(美空) 히바리가 죽었다고 일본열도가 초상집처럼 슬픔에 잠긴 것은 우리에게 놀랍다.'엔카'란 일본 유행가로서 한국으로 치면 뽕짝이다. 군사정권 시절 '왜색 가요'라 해서 금지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일본에서 불렀으면 엔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부를 경우 그것이 일본의 엔카가 아니라고 지적할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럼 뽕짝 가수가 죽었다고 국민이 애도하는 게 무엇이 놀라우냐는 반문이 따를 수 있으나 일본의 그 초상분위기에는 분명 놀라운 데가 있다. 바로 그 해 가을 패티 김이 가요데뷔 30주년 공연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빌리려 했을 때 회관측이 난색을 보인 것이 그렇다.
패티 김이 고생한 바람에 그 얼마 뒤 역시 30주년 공연을 한 이미자는 무임승차하듯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으나 서구풍의 노래를 부르는 패티 김이건 뽕짝을 부르는 '한국의 히바리' 이미자건 '국민가수'가 아니라 '대중가수'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성악가'들의 안방인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들은 국외자였기에 엄청난 수모를 겪으며 겨우 서자로 턱걸이한 셈이다.
일본의 초상분위기가 더 놀라운 것은 히바리가 한국계여서다. 37년 생선가게를 하는 한국계 가토 가즈에(加藤和枝)로 태어난 히바리는 8살 미소라 가즈에를 거쳐 10살에는 미소라 히바리라는'천재소녀'를 거쳐 일본 국민가수로 삶을 마친다. 그래서 죽은 지 10여일이 지난 7월 4일에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국민영예상을 추서 받아 오사다하루(王貞治) 등과 동열에 선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혈통이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일본인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패전 직후의 일본인들은 히바리의 노래에서 고통을 위로 받으면 그만이었다. 히바리의 노래 1천7백곡을 듣는 동안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경제대국이 되고 그는 '일본주식회사의 사가(社歌)를 부른 가수'가 된다.
히바리의 그 성공에는 타고난 천재에 못지 않은 미모도 한 몫했다. 그는 소녀때부터 가수이자 배우로 죽은 뒤인 9월 5일에는 '당신이 선택한 쇼와(昭和)의 미인'에 일등으로 뽑혔다.
그는 가수나 배우가 아닌 배우적 가수로 볼 수 있다. 그의 명곡 가운데 하나인 '슬픈 술'이 성공한 것은 그 전형적인 경우다.
이 노래는 원래 다른 가수가 불렀던 것을 히바리가 불렀으나 처음에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히바리는 TV 같은 데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것은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이를 작곡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에게는 그것이 처음 듣는 노래처럼 들렸다. 그것은 미모의 배우이자 가수라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삶 자체는 불우했던 히바리의 연기 아닌 삶에서 우러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말 그대로 '엔카(演歌)' 가수인지 모른다. 바로 그 곡을 지은 고가가 한국에서 선린상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엔카는 현해탄을 오가는 두 나라의 뽕짝이다. 지금도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술잔을 앞에 놓고 눈물짓는 젊은이는 '슬픈 술' 같은 독백을 읊조릴 수 있다. "홀로 술집에서 마시는 술은/ 이별의 눈물의 맛이 있어/ 마셔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 모습이/ 마시면 술잔에 다시 떠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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