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운동선수들의 ‘환갑’이 화제가 된다. 물론 그것은 지난날 잘 나가다 은퇴한 전직 스포츠맨이 자식들에게서 회갑상을 받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운동선수가 나이에 밀려 현역에서 물러나는 시기가 언제냐는 문제다.
1994년 헤비급 복서 조지 포먼이 45세의 나이에 마이클 무어러를 10회 KO로 물리치고 WBC와 IBF 통합챔피언이 됐을 때가 그랬다. 권투선수라면 30대 중반이 회갑이고 40대라면 고희로 보았던 통념이 카운터펀치를 맞으면서 권투 선수의 나이가 화두가 됐다.
그러나 포먼의 경우는 예외고 운동선수들에게도 요즘의 ‘사오정 오륙도’ 같은 것은 있다. 물론 그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정하나 ‘직장’에 따라 어느 정도 기준은 있다. 몸놀림이 격렬하지 않은 야구계는 대체로 나이가 후해 장훈(張勳)이나 오 사다하루(王貞治)도 40 가까이 돼서 가장 원숙한 타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수영은 각박해 84년의 LA올림픽에서는 20세가 회갑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두뇌 스포츠’라는 바둑이다. 지난해 이세돌이 19세에 후지쓰배를 우승하는가 하면 그 한편에서 50세의 조훈현은 함량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으나 아직 ‘바둑 황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창호가 슬럼프라는 소식은 걱정스럽다. 그가 지난 3월 처음으로 5번기 국제기전인 LG배에서 이세돌에게 3대 1로 진 이후 보여주고 있는 슬럼프는 지난날 그가 가끔 보여주었던 슬럼프와 다른 데가 있어서다.
90년대 초 스승이던 조훈현으로부터 타이틀을 하나씩 뺏어 무관왕으로 만들고 자신은 전관왕이 된 그는 다시 조훈현과 유창혁 등의 반격으로 타이틀을 뺏기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걱정하기보다 환영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싹쓸이를 싫어하는 심리와도 거리가 있었다. 아직 10대인 그가 너무 빨리 치솟는 것을 걱정하거나 조훈현이라는 거목이 너무 빨리 시들어서는 안 된다는 심리였다.
그러나 이창호가 자신보다 8살 아래의 이세돌에게 진 것은 다른 이야기다. 사람들은 엊그제까지의 여드름 투성이의 10대 소년이 어느새 28살의 청년이 돼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새삼 프로기사의 나이를 생각하게 됐다.
LG배 이래 이창호의 전적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지난 6월 유창혁에게 패왕 타이틀을 뺏긴 것은 0대 3이라는 그 전적보다도 내용이 더 아팠다. 그가 처음 두 판을 내리 지는 일은 흔했으나 제3국에서 유리한 바둑을 반 집 차로 진 것은 놀라웠다. 반면이 유리한 데다 결정적인 승부처도 없어 ‘세계 최고의 공격수’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기로 반 집을 졌으니 두 기사의 소프트웨어가 잠시 바뀌었던 것인가.
걱정을 하다 보면 최근 LG배 16강 전에서 그가 조치훈과 가진 대국도 그렇다. 이창호는 백으로 198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었으나 그 때까지 이창호의 조치훈에 대한 전적( 6승 1패)을 떠올리면 그것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창호에게 유리했던 대국이 막판에 혼전으로 간 것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덕택에 이창호는 큰 수를 내서 불계승을 거두었으나 그것은 이창호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아니다. 권투로 치면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에게 4번 다운 당한 끝에 거둔 역전KO승이나‘쾌승’ 같은 것은 유창혁이나 이세돌의 팬들이 바라는 바이고 이창호의 팬들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일정한 리드를 신산(神算)이라는 신의 방패로 지켜내는 ‘완승’이다.
바로 그 신산에 이상이 비치는 듯 해서 바둑팬들은 새삼 프로기사의 나이에 관심을 기울게 됐다.‘신선 놀음’이라는 그림에 가려진 ‘살인 놀음’이라는 밑그림에 눈길을 주게 된 것이다. 일본의 3대 기전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제한시간 8시간으로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이 대국을 한번 치르면 마라톤을 완주하듯 체중이 3-4㎏이나 빠진다던가. 그것은 온 머리를 짜내서 겨루는 150합의 싸움이니 삼국지 같은 데 흔히 나오는 백여 합의 싸움이 거짓만은 아니다.
그 한 합 한 합이 너무 힘겨워 엊그제 ‘천재소년’이라는 각광을 받으며 입단한 소년기사가 어느새 ‘바둑 싸움’대신 ‘바둑 보급’이라며 칼 대신 백묵을 쥐기도 한다.
물론 1년도 아닌 반년의 전적을 두고 이창호의 나이를 들먹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창호는 슬럼프에 빠져서만이 아니라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조치훈과의 대국이 싸움바둑이 된 것도 그의 신산이 무디어져서가 아니라 그가 신산이라는 방패 위에 창을 더하고 싶어서라고 볼 수도 있다. 신산이란 유리하게 된 반면을 지키는 방패일 뿐 반면을 유리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은 아니며 따라서 날로 거세지는 세계 바둑계의 수장 자리를 지켜낼 여의봉은 아니다.
더욱이 프로기사의 나이에는 탄력도 있다. 한국에는 50세의 바둑황제가 있고 그의 스승이던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는 58세에 일본 최대의 기성(棋聖)타이틀을 가진 ‘바둑 천황’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두뇌 스포츠의 ‘근육’은 마라톤 선수의 근육과는 다른 데가 있다. 그 근육은 두뇌의 어딘가에 있는 ‘의지’나 ‘투혼’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돌부처 이창호의 경우 그 ‘근육’은 돌이다. 최근 부진은 그 돌이 풍화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이끼가 끼어 더 멋있는 돌부처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으로 보고 싶다.
조훈현이 한국바둑의 어제였다면 이창호는 한국바둑의 ‘오늘’이고 그 오늘은 이어져야 한다. 그 오늘은 유창혁이나 이세돌이 함께 할수록 더 미더우나 이창호가 빠지면 어딘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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