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오늘 오키나와 전투가 끝났다는 기록은 여러 기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전투는 시작이나 끝이나 기록이 여럿이다. 그 해 3월 하순 미군이 이 섬을 공습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하고 미군이 상륙 교두보를 확보한 4월 1일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그로부터 80일간 사라진 목숨도 미국과 일본 사이에 크게 엇갈린다. 일본측은 일본군 10만 2천명과 미군 4만7천명 그리고 민간인 12만이 죽었다고 하나 미국은 일본군 6만 5천명에 미군은 1만 1천여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전투는 일본군 사령부의 참모들이 총출전해 모두 죽은 6월 19일 끝난 셈이나 미군이 섬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그 이틀 뒤다.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 중장이 참모장과 함께 할복자살한 것은 그 이틀 뒤인 23일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날을 두고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이 싸움을 이길 것으로 보지도 않았으니 이 싸움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끝났다는 설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지기 위해서 싸웠다는 말인가. 바둑의 사석(捨石)작전을 아는 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바둑에서 일정한 돌을 버림돌로 삼아 큰 것을 얻는 것이야말로 고수가 되는 첫걸음이다.
문제는 일본군의 그 버림돌이 너무 큰 데 있다. 말이 섬이지 17세기 초까지도 엄연히 류구(琉球)라는 왕국을 주민과 함께 10만의 장병까지 버림돌로 삼아서 일본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본토를 지키고 나아가서는 천황제(天皇制)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그 때까지 계속 미군에게 지면서 이미 패전을 각오했으나 오키나와 전투는 의미가 달랐다. 그 곳은 필리핀과는 다른 ‘일본 국토’고 일본은 이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 주어야 했다. 오키나와 점령이 그처럼 어려운 판에 본토를 점령하기는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실증해 주어야 본토와 천황제가 무사하리라는 판단에서다.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작전이 하일라이트를 장식한 것도 오키나와 전투에서였다. 물론 그 신풍도 미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군이 자랑하던 역사상 최대의 전함 야마토(大和)만 바다 속에 들어 갔다.
그러나 버림돌은 효과가 있었다. 일본 본토도 아닌 오키나와에서 1만 명 이상의 인명을 빼앗긴 미군에게 본토 점령작전이 아득하게 비친 점이다. 물론 태평양전쟁을 둘러싸고 나도는 이야기들이 그렇듯 오키나와전투에 임하던 일본군 수뇌부의 속내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이 야마토호를 버림돌처럼 오키나와에 투입한 것은 뚜렷한 사실이다.
그리고 보면 오키나와는 버림돌로서 걸맞은 데가 있다. 일본인에게 그 섬은 식민지 같은 곳이고 그곳 주민은 동포가 아닌 ‘원주민’이었다. 그곳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와 작업부들이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원주민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는지 천덕꾸러기였는지는 살아 남은 이들이 없다시피 해 알 길이 없다. 위안부들이 불렀다는 ‘아리랑’이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지난 18일에는 그곳에서 성폭행을 한 미 해병의 신병이 일본경찰에 넘어갔다. 오키나와 전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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