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오늘 공포된 농지개혁법은 우리 역사에서 흔해 빠진 '법'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박경리의 '토지' 와는 다른 이승만의 '토지'로 문학이 아니라 종교적인 복음서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광복 이듬해인 46년 3월 김일성이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하자 "공자 맹자도 해결할 수 없었던 토지문제를 김일성 장군이 해결"했다는 북한주민들의 반응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토지개혁을 김일성이 주도했느냐 소련점령군이 해결했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다른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공자와 맹자'이래 해결되지 못해온 문제였다는 데는 다른 말이 없다. 반고(盤古)의 몸에서 하늘과 땅이 생겨난 이래 그 땅을 차지한 자와 가꾸는 자는 달랐으나 공자와 맹자는 이를 해결하기는커녕 관심도 비칠 수 없었다.
그것은 남한이라고 다를 수 없었다. "이 박사 덕에 쌀밥 먹게 됐다"는 말도 얼핏 내용은 다르나 복음서 같은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 '토지'에는 소설 같은 데가 있었다. 이승만의 '토지'는 물론 그보다 앞서 나온 김일성의 '토지'도 그렇고 이들 두 '토지'가 서로 얽혀 제3의 '토지' 같은 것이 나오게 된 것도 박경리의 '토지'보다 스토리가 복잡하다.
물론 김일성의 '토지'는 이승만의 그것과 뿌리부터 다르다. 그 연륜도 3년여가 아니라 15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김일성은 33년부터 35년 사이에 자신의 해방구에서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실시했었다.
그것은 일제의 맹공세로 실패하고 말았으나 광복으로 해방구가 아니라 해방된 북한에서 이를 실시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3월 초순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이 그 달이 가기 전에 큰 무리 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것은 지난날의 노하우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전통을 가진 소련군 점령하에서 지주들의 토지를 거저 뺏어(무상몰수) 농민에게 거저 나누어 준(무상분배) 북한의 '토지'는 남한의 그것에 비하면 단편소설처럼 구조가 간단하다.
친일 지주들을 주축으로 하는 한민당 등이 원내를 점령한 남한에서 토지를 뺏어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만큼이나 산고를 겪어야 했다.
이승만은 표면상 이들 지주세력과 한 편이면서도 이들이 너무 강한 것은 싫었기에 이들에게서 힘의 원천인 토지를 빼앗고 싶었다. 반공으로 유명한 그가 모스크바 동방 노동자대학 출신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장관으로 앉혀 토지개혁을 실시한 것도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지주세력, 조봉암 등이 얽힌 남한의 '토지'는 '삼국지'같은 3차원의 소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들의 주장을 묵살할 수는 없어 지주들의 땅을 국가에서 돈을 주고 사들여(유상몰수) 농민들에게 파는(유상분배) 식으로 절충된 농지개혁은 실시되기도 전에 한국전을 만난다. 그래서 아직 자기 논을 갖지 못한 소작인의 아들들이 주축이 돼 '자작농'의 아들들을 막는 싸움이 시작됐다.
전쟁의 이면에서 '삼국지'도 끊임없이 펼쳐졌다. 전쟁이 끝나자 지주세력은 야당으로 이승만과 갈라 서 있고 조봉암 등은 더 멀리 떨어져 있다가 곧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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