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오늘 프랑스 작가 쥘 공쿠르가 40세의 나이에 숨지나 그의 이름은 여러 모습으로 남는다. 그보다 8살 위이자 역시 작가인 형 에드몽은 그 뒤 26년이나 더 살았고 그러는 동안‘공쿠르 형제작가’ 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드몽이 죽자 7년 뒤인 1903년 ‘아카데미 공쿠르’가 발족해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주면서 이들 형제의 이름은 문학상의 대명사처럼 남게 됐다.
아우가 형보다 훨씬 먼저 간 이들 형제에게는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통념도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내성적인 형과 정열적인 아우가 분신처럼 어울려 그 자체 하나의 작품을 이룬 셈이다. 둘 다 독신으로 죽어 더 그렇다.
귀중품보관소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좌절감에 빠졌던 형 에드몽은 부유한 미망인인 어머니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자 자신감을 회복하나 그 때부터 형제는 또 다른 ‘방황’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가가 되려 각국으로 스케치여행을 다니다 연극에 빠지기도 한다.
1851년 처음으로 소설을 내놓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852년에는 기자로써 르네상스시대의 성애시(性愛詩)를 인용하다가 풍기문란으로 기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2년 뒤 사회사를 출판하면서 이들은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860년부터 상류와 하류 계급을 솔직히 분석한 소설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864년의 ‘제르미니 라세르퇴’는 그들의 착한 하녀가 돈을 훔쳐 밤의 유흥에 탕진한 사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를 ‘불결한 문학’이라는 비판이 일자 졸라가 이를 반박함으로써 한결 유명해졌다. 그들의 소설은 대부분 형이 작품을 구상하고 문장력이 좋은 아우가 글을 쓰는 형식이어서 작가는 ‘공쿠르’로 돼 있다.
아우가 죽은 뒤인 1887년부터 1896년에 걸쳐 에드몽이 9권으로 내논 ‘일기’도 작가는 형제로 돼 있다. 이 일기는 1851년부터 동생이 죽을 때까지 모든 계층의 생활상, 문단소식, 비평에다 음담패설까지 망라한 것으로 19세기 문화사의 금자탑이 된 셈이다. 그리고 형인 에드몽이 죽으면서 유언처럼 부탁한 공쿠르상도 아우와 함께 구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매년 12월에 시상하고 있는 공쿠르상은 우리에게 너무 부럽다. 상금이 많은 것은 아니다. 유로가 도입되기 전의 상금은 50프랑으로 1만원도 안됐다. 2000년에 상금이 5천만원으로 오른 한국의 동인문학상과는 비교할 터수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문학상들이 상금에 비례해 문학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느낌보다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점이다. 지난해 계간 ‘문학인’이 한국문학창작학회와 공동으로 심사한 ‘20세기 한국문학사 10대사건 및 100대 소설’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뽑힌 황석영(黃晳暎)이 2000년 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르자 그 자체를 거부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 해 동인문학상과 쌍벽을 이루는 이상문학상이 수상작인 이인화의 ‘시인의 별’로 구설수에 오른 것과는 다른 사건이다. 황석영이 심사대상에 오른 것마저 거부한 것은 동인문학상을 시상하는 조선일보의 위상에 관한 것이고 이상문학상의 그것은 심사의 공정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계가 아직 큰 문학상을 줄 수 있는 금력에 비례해 ‘권위’를 갖추지 못한 데서 일어난 사건임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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