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오늘 멕시코 황제가 혁명으로 국민들에게 붙들려 처형당한 사건은 보통 두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고도 하고 ‘막시밀리앙 황제의 처형’이라고도 한다. 앞의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우인 그를 태생 그 대로의 발음으로 불러준 것이다. 뒤의 것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이를 소재로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고작 하나의 그림을 가지고 역사상의 이름까지 바꾸려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그 그림은 예술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오스트리아나 멕시코 역사만이 아니라 최근 이라크 문제로 얼굴을 붉힌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도 숨어 있다.
사건의 발단은 1821년 독립한 멕시코가 계속 정정이 혼미하다 1861년 외채지불을 동결하자 프랑스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이 개입하면서였다. 다른 나라들은 일찍 손을 뗐으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인디언 출신인 베니토 후아레스의 멕시코 공화정부가 개혁을 앞세우며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거슬려 아예 막시밀리안을 괴뢰 황제로 내세워 가톨릭 국가를 세우려 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에 정신이 없어 기회도 좋아 보였으나 전쟁이 끝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은 유럽문제에 간여하지 않을 테니 유럽도 미주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먼로주의를 앞세워 프랑스를 압박했고 나폴레옹 3세는 힘없이 물러나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반군들에게 붙들려 희생된 것이다.
따라서 마네의 그림은 프랑스인의 애국심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마네는 나폴레옹 3세의 모습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처형에 임하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의연한 모습에는 그의 비겁함이 숨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그림은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국민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분위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대륙봉쇄령이 거덜나서 이루어진 스페인 침략을 그린 고야의 그림이 나폴레옹 1세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라면 마네의 그것은 3년 뒤로 다가온 나폴레옹 3세, 나아가 나폴레옹가의 완전한 몰락을 암시한 것이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백부에 비해 무능한 3세는 멕시코에서의 실패에 이어 3년 뒤에는 프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다 포로가 돼 나폴에옹 왕가는 물론 프랑스의 군주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의 멕시코 정책으로 막시밀리안이 죽고 화가 마네가 날개를 달았다면 보불전쟁은 그 자신을 희생하여 비스마르크를 대륙의 패자로 만들고 프랑스 공화제를 확립시킨 셈이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은 그 뒤에도 어지럽게 춤을 춘다. 멕시코에서 한 편이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1차 대전에서 적대국이 되고 미국은 먼로주의를 모른다는 듯 전쟁에 끼어들어 프랑스를 편든다. 그 전쟁에서 적대하던 독일과 프랑스는 최근 이라크 사태를 두고는 미국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화가 고야와 프랑스 화가 마네의 눈은 60년의 차이를 두고도 다르지 않았다. 마네로부터 70년 뒤 피카소가 조국인 스페인의 프랑코 학정을 고발하는 ‘게르니카’를 그렸을 때도 그는 ‘스페인 화가’가 아닌 ‘반전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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