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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와 미선이의 죽음/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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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와 미선이의 죽음/6월 18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42>

여중생 사망 이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천덕꾸러기처럼 됐다. 오래 전부터 이 조약은 너무 불평등해서 고쳐려고 수선소에라도 내논 듯했으나 여중생 사건 이후에는 당장 없어져도 아깝지 않은 불평등조약처럼 비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겨날 때는 구세주 같은 조약으로서 나름의 ‘구국적 결단’을 통해서야 얻어낼 수 있었다. 반세기전 오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그 결단이다. 그 열흘 전에 이루어진 유엔군과 공산군의 합의에 따라 북측으로 보내야 할 반공포로 3만7천명 가운데 2만7천92명을 이날 새벽 기습적으로 석방시킨 것이다.

그것은 반공을 원하는 포로들에게 자유를 준 차원이 아니라 전쟁기간 내내 미국에 가려진 채 존재가 없던 한국이 그 존재를 과시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대구 부산 마산 영천 광주 등 7개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의 실질적인 감시는 한국군 헌병이 맡았기에 이승만의 한마디에 석방이 가능했고 그것은 포로 문제를 떠나서 한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휴전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의 성사단계에 이른 휴전을 가지고 인질극 같은 것을 벌인 셈으로 미국이 휴전 후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약속함으로써 휴전은 이루어졌다. 그 정황은 당시 소련의 한 잡지가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지난 3년 동안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별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이승만은 부산의 한 모퉁이, 미군 병사의 뒤뜰에 안치돼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이승만이 너무 강력해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 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쇼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공산측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석방된 포로들을 재수용시키라고 다그쳤으나 그들도 지난 3년간의 무의미한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일성과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한국으로부터 휴전을 보장받도록 미국을 채근함으로써 오히려 이승만의 입지를 올려주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대외적 입지만 높여준 게 아니다. 그것은 ‘국부’와 ‘분단의 원흉’, 그리고 ‘항일투사’와 ‘친일파의 대부’라는 양 극단의 평가에 시달리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미국을 방문한 그가 상하양원합동회의 연설에서 소련을 당장 쳐부셔야 한다고 함으로써 미국 정가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로 낙인찍힌 것은 오직 미국의 시각일 뿐이다.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1년 전인 52년 5월 25일에도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트레일러처럼 끌고 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당시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공을 세운 원용덕도 그의 지시라면 무슨 일이든지 따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파동에서 세운 공으로 헌병사령관이 되어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그래서 미국을 그처럼 놀라게 했으나 이승만도 그도 몰락하지 않고 4.19까지 갔기에 아직도 반공포로 석방을 두고는 온갖 소문이 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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