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 도대체 누가 신숙주야?”하고 묻는 경우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샜을 때 누가 고자질했느냐는 말이다. “누가 유다야?”나 같은 말이다.
1475년 오늘 숨진 신숙주(申叔舟)는 그래서 골치 아픈 존재다. 그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도운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그보다 더 악명 높은 권람이나 한명회도 있는데 유독 그가 배신자의 상징으로 비치는 것이 우선 그렇다.
적어도 그는 단종 복위를 위한 성삼문 등의 거사계획에 참가한 적이 없고 따라서 밀고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들의 모의에서 살생부에 올라 있었고 그를 처리하는 문제로 이견이 있어 대사를 그르쳤다는 말도 있다. 따라서 그가 거사를 망친 것이 있다면 차라리 그런 편일 것이다.
그의 부인 윤씨를 둘러싼 야사도 그렇다. 사륙신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윤씨는 종들에게 끌려가는 대신들 가운데 남편이 있는가를 묻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자 자결했다는 이야기다. 그 자결도 은장도로 했느니 다락에서 목을 매었느니 하며 소설에도 나온다.
물론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역적으로 몰리면 종들이 알릴 것도 없이 금부의 관원들이 들이 닥쳐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끌려 간다. 그렇게 끌려간 여자들을 공신들이 많이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신숙주도 그 한 수혜자였으니 그는 여자를 잃기는커녕 얻은 셈이다. 그의 부인은 ‘윤회와 거위’로 유명한 학자 윤회(尹淮)의 손녀로 죽기는커녕 벼슬까지 받았고 세조2년에 그가 죽자 세조는 관과 함께 쌀 등 곡식을 50석이나 하사했다.
그래서 저승길도 떵떵거리고 간 윤씨를 야사에서 비명횡사시킨 것은 신숙주에 대한 단순한 미움을 넘어 그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이 엉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삼문보다 한 살 위이자 같은 해 급제한 그는 역사에서 줄곧 성삼문과 공동주연처럼 등장한다. 세종시절에는 같은 편이고 단종대에 와서는 반대편이나 공동주연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500년이 지난 오늘날도 곧잘 ‘성삼문과 신숙주’라는 강연이나 글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동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것은 선비가 학문만 해야 하느냐 정치를 해야 하느냐는 논쟁이 부질없는 것과 같다. 성삼문이 정적인 인물이라면 신숙주는 함길도에서 야인정벌에도 공을 세우는 등 무인의 자질도 갖춘 역동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삼국지에서 죄 없는 여백사를 죽인 조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인물이 문종2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는 야심가 수양대군의 서장관으로 수행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베이징에서 영락제(永樂帝)의 묘를 찾은 것은 필연이다. 영락제는 당태종이나 조선의 태종처럼 혈육을 죽이고 올랐고 제위에 오른 인물로 그의 묘호도 ‘태종’이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그는 반란으로 장조카 혜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으나 군주로는 유능한 평가가 있고 그런 점에서도 다른 태종들과 비슷하다.
그 영락제는 생전에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나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두 사람이 그 묘소 찾기로 한 것은 요즘으로 치면 뜻이 맞은 사람들이 국립묘지를 참배한 식이다. 문제는 요즘도 영락제 같은 인물을 미화하는 이들이 많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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