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오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페루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5세기 전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점령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알베르토’보다 ‘후지모리’로 알려진 일본계니 불과 10만의 일본계 주민이 2천6백만의 페루를 정복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한물갔는지는 모르나 피는 적어도 물만큼은 진해서 소수민족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구경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것은 1532년 용병을 거느린 에스파냐의 탐험가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불과 1백67명의 병력으로 잉카제국의 황제를 붙들어 사형시키고 제국을 점령한 일을 연상케 한다. 그 잉카제국의 주인공들이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간 것을 떠올리면 후지모리의 당선은 아시아계가 잃었던 잉카제국을 되찾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우스개 소리다. 후지모리는 그로부터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는 지난 3월 인터폴에 수배된 상태다.
한국인 가운데 그것을 ‘같은 아시아인’으로써 애석해 하는 이와 고소해 하는 이가 어떤 비율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지모리를 대통령으로 밀어준 페루, 나아가서 남미의 일본인 사회는 후지모리와 함께 몰락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미는 후지모리의 소식에 곁들여 관심을 기울일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지모리의 당선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 일본이 오래 전부터 남미에서 가꾸어 온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고 그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남미 이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된 일이나 1889년에는 사업가 다카바시가 페루에서 은산을 경영하러 떠나고 4년 뒤에는 하와이에 이민 갔던 일본인 1백40명이 과테말라로 재이민을 간다. 그 2년 뒤에는 멕시코에 일본인 이주조합이 설립되더니 2년 뒤에는 ‘식민지’가 개발된다.
물론 그 식민지는 제국주의의 그것이 아니라 일본 농민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의 남미 사회는 상당부분 그런 농경사회의 바탕을 잃지 않았다. 일본 이민 2세인 후지모리도 농업경제학자로 리마국립농대 학장으로 출세가두를 달린다.
이에 비하면 한국과 중국의 남미 이민은 조선과 청이라는 몰락하는 왕조 아래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였다. 을사조약이 일어나던 1905년 1천33명의 노예노동자들이 멕시코로 떠난 조선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중국의 경우 이미 1847년에 페루에만도 12만명의 노예노동자인 쿨리(苦力)들이 있었고 그들의 인해전술은 나름의 힘을 갖추고 있으나 일본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파라과이에서 일본인들은 남한 절반정도의 땅을 갖고 있고 그것은 파라과이의 경우만도 아니다.
숫자마저 적은 한국 이민들은 고국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현지인과 결혼함으로써 혈연도 끊어지는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제3국을 택해 브라질에 간 반공포로 55명도 그런 길을 걸었다. 그 뒤 60년대부터 시작된 이민은 그런 것은 피할 수 있으나 숫적으로 열세한 데다 단결이 되지 않은 것은 숙제로 남아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역사처럼 어두운 과거고 남미는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독립했고 남미는 지난날처럼 먼 곳이 아니라 지구촌의 이웃이다.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후지모리가 2006년의 대선에 나설 궁리를 하는 것도 그런 구조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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