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을 마다 않고 일본을 찾은 한국 원수에게 찬물을 끼얹듯 일본 참의원에서 통과된 유사법제를 둘러싸고 국내서도 치고 받는 소리가 높다. 자민련 대변인이 이를 두고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소아병적이라는 성명을 발표해서다.
그 논란의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접어두고 자민련 성명에서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를 지적한 부분은 수긍이 간다. 유사법제는 진주만을 기습하던 일본의 항공모함처럼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어서다.
그것은 1954년 오늘 일본에서 방위청 설치법과 자위대법이 공포될 때 씨가 뿌려진 것이나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걱정한 이들은 더 드물었다. 휴전 후 1년도 안된 그 시절 일본의 재무장은 걱정스럽기보다 반가운 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본산인 미 극동군 사령부가 있던 일본은 맥아더만큼이나 미더운 우방이었다.
실은 일본이 자위대를 설치한 자체가 우리의 혈맹인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을 통해 일본군을 궤멸시킨 미국은 그 싹도 나지 않도록 “일본은 전쟁을 부인하며 국제평화를 성실히 추구하고… 육ㆍ해ㆍ공군 및 기타의 무력은 이를 보유치 아니한다”는 평화헌법을 강요했으나 이를 바꾸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 따라 주일미군이 한국전선으로 옮기자 맥아더는 그 해 7월 일본의 치안유지를 위해 7만 5천명의 경찰예비대를 창설하도록 요청한다. 그래서 8월 10일 보병 4개 사단 규모의 보안대가 구성되더니 52년 해안보안대와 통합해 보안청이 성립됐고 그 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자위대 설치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렇게 싹이 튼 자위대는 미소 냉전에 가려진 채 계속 자라나 소련이 무너지고 보니 세계 2위의 군사력이 돼 있다. 비록 핵무기가 없고 보통의 군대가 아니라 국토만 지키는 전수(戰守)방위를 위한 것이라고 내숭을 떨었으나 모두 싱거운 소리였다.
일본에게 파키스탄도 갖고 있는 핵무기는 부자가 가전제품 들여오듯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킹콩처럼 큰 덩치가 웃으면서 "너 안 때릴께“하고 손을 쥐기만 해도 손이 으스러지고 가슴이 막힌다.
미국의 코드에 따라 태어난 자위대는 미국의 코드에 따라 그나마 ‘자위대’라는 올챙이 꼬리마저 떼고‘보통 군대’로 날개를 키우는 길을 걸어왔다. 1991년 걸프전쟁이 일어나자 자위대는 ‘UN평화유지군’이라는 기치를 앞세우고 반세기전 그들이 진출했던 남양군도를 지나 페르시아만까지 진출했고 아프간 전쟁이 나자 미국 못지않게 ‘테러’를 규탄했다.
다만 일본의 군국화는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1970년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일본 무사도와는 거리가 먼 자위대의 반성을 촉구하며 할복자살했다. 그 25년 뒤에는 아쿠다가와상 수상작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일본은 거세된 환관 같은 나라”라며 25년간 머물던 정계를 떠나기도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피와 희생 속에 자라온 그들의 보수주의가 무섭다. 그것은 한국의 자타칭 보수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들도 당황할 것 없이 차근히 보수의 길을 걸으면 된다. 아들의 병역을 피하려 잔꾀를 굴리지 않는 것도 그 첫걸음일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