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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명의 힘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

I. 아름다운 생명의 찬가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처럼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상생관계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또한 매일매일 또 다른 삶을 산다. 악이라는 일시적 행동을 경험하지 않으면 선이라는 아름다운 행동을 수행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여성이라는 다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성이라는 차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잠이라는 일시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삶이라는 아름다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삶과 죽음 등등의 이분법을 만드는 것은 마치 선이 악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삶이 죽음을 지배한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식이다. 우리의 근대적 지식은 이와 같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주의,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남성 중심주의,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토대로 하는 프로이드의 근대 정신분석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근대적 지식들은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따라서 영화 이미지를 통한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근대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러한 근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식에서 벗어나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을 상생의 관계로 사유하게 만드는 탈근대적 지식 생산의 영화인가를 잘 보여준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2011)

선과 악이나 남성과 여성처럼 잠이라는 일상적 죽음이 아닌 자연적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근대적으로 만들어진 하루라는 일과의 일상적 삶이 아닌 자연적 삶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어브 라이프>는 동생의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은 암이라는 죽음의 선고를 통하여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테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어브 라이프>는 "삶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현실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삶의 구성을 도외시하면서 이미 근대적으로 형성된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지식으로 삶을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트리 어브 라이프>는 블랙홀로부터 공룡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영상 이미지를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신은 무엇인가?"라는 상투적인 질문으로 치환되어 영화감독이 배치한 추상적 자연의 이미지들로 끝을 맺는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자신이 자신의 동생에게는 왜 아버지와 똑같은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즉 미국과 미국인의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현실의 삶은 추상적인 신과 자연의 이미지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II. 근대적 삶과 탈근대적 삶

▲ 영화 <비우티풀> 중 한 장면


<트리 어브 라이프>처럼 근대적인 것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탈근대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영화적 치장에 머무르는 것이 미국 헐리웃 영화들이 지니는 근대적 상상력의 한계이다. 이와 반대로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근대적인 삶들에 대하여 저항하면서 영화 이미지들을 통한 탈근대적 사유를 촉발시킨다. <비우티풀>은 <트리 어브 라이프>의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영상 이미지들과는 달리 추하고 어두운 근대적 삶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5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구적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지 세계를 창출한 도시! 콜롬부스가 황금과 향료의 나라, 인도로 가기 위하여 항해를 시작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곳! 비록 지난 500년의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유렵의 근대성과 동시에 세계의 식민지성을 지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헤게모니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로 이전되었지만, 지난 500년 동안에 이루어진 서구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뿐이겠는가? 영국의 런던이 그렇고, 프랑스의 파리가 그렇고, 독일의 베를린이 그러하며, 또한 미국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혹은 로스앤젤레스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냐리투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적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근대적 출구를 사유하도록 만드는 영화들이다. 멕시코시티의 근대적 삶을 이야기하는 <아모레스 페로스(사랑은 개)>(2000)가 그렇고,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뒤엉켜 있는 아프리카(모로코)와 아시아(일본)와 아메리카(멕시코와 미국)를 다양한 언어들로 연결시키는 <바벨>(2006)이 그러하며, 근대적 삶에 왜곡되어 있는 생명 그 자체를 다루고 있는 <21 그램>(2003)이 그러하다. 다른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비우티풀>에 등장하는 유스발(하이에르 바르뎀 분)은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마약을 중개하는 중개상이며,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밀입국자들을 짝퉁가방 공장에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다."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마약을 중개하고, 인력브로커라는 의미에서 근대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산적이거나 생성적인 삶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근대인이라는 것이다. 근대적이거나 식민지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대부분 유스발이 마약을 중개하는 것처럼 금융을 중개하거나 지식을 중개하고 혹은 상품을 중개한다. 중개하는 지식이나 마약을 사거나 파는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 유스발처럼 밀입국자이든지 혹은 지방 출신이든지간에 그들을 짝퉁가방 공장과 같은 대학이나 회사 혹은 정부에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다.

우리들 대부분처럼 유스발은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중개하는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이 마약인지 아닌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을 중개하면서 만들어지는 월급이나 중개료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밀입국자이든지 누구이든지간에 우리가 부모나 교사이거나 교수 혹은 선배나 어른이라는 이름의 인력브로커로 작용하여 그들이 일하거나 공부하는 회사나 대학이나 정부가 그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인력브로커로 일하는 우리의 관심은 단지 그들의 노동을 통하여 잉여 이익을 취득하는 것뿐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삶과 죽음이 작동하는 관계의 법칙은 이분법이 아닌 상생의 관계이다. 모든 관계는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되는,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되는 상호 생성적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들 대부분이 중개하는 지식이나 금융이나 상품이 유스발이 중개하는 마약처럼 누군가를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이라면, 혹은 우리가 알선하는 대학이나 회사나 정부가 유스발이 알선하는 공장처럼 누군가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곳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핍박하여 나 자신을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이다.

유스발은 3개월 시한부의 암 선고를 받고 난 후에야 마침내 자신의 삶이 죽음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 인민전선 군에 있었던 유스발의 할아버지가 정치적 망명지로 선택한 멕시코, 그리고 그의 손자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약 중개인과 인력브로커로 일하게 되는 바르셀로나. 이것은 단지 유스발의 삶만이 지니는 근대의 비극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온 흑인 부부, 아시아의 중국에서 온 불법이주민들은 모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하여 500년 동안 지구촌 전체를 삼켜버린 근대성과 식민지성의 산물이다. 서로서로의 피를 빨아먹는 중계상과 인력브로커는 비르셀로나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국가의 정부나 은행 혹은 기업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근대성과 식민지성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삶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나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죽은 아버지와 꿈속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속의 대화를 토대로 현실의 관계를 상호 생성적인 관계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는 불법이주민으로 추방당한 세네갈 남성의 부인과 아기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이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중국 불법이주민들을 돌본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져 마약을 일삼는 아내로부터 피폐해진 자신의 아이들을 돌본다.

근대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탈근대적 삶이 모두 생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스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중심가에서 마약을 판 아프리카 흑인들은 경찰의 무자비한 단속으로 강제출국을 당하고, 추위를 조금이라도 이기라고 사다 준 난로에서 가스가 새어나와 중국인 불법이주민들이 몰살을 당하기도 한다. 서구적 근대가 만든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구조가 자본과 잉여이익으로 남아 아름다운 바르셀로나 해변을 죽음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은 근대적 현실의 삶을 서서히 바꾼다. 마침내 유스발은 서서히 죽어가지만, 옆에서 죽어가는 그를 지켜주고 있는 그의 어린 딸의 기억은 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으로 그녀의 삶을 지켜줄 것이고, 그의 아름다운 삶은 오직 자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흑인 여성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만든다. 세네갈에서 탈주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오려는 그녀의 남편은 암흑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스발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세네갈 출신의 흑인 여성과 그의 딸과 아들이 만드는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은 스페인과 아프리카와 멕시코를 탈근대의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들의 삶이 백인과 흑인, 혹은 스페인과 멕시코라는 이분법의 지배와 피지배나 주인과 노예의 파괴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생성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III. 예술적 생명의 힘

▲ 영화 <비우티풀> 중 한 장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는 근대적 일상 속에서 스페인과 멕시코, 스페인과 아프리카라는 근대적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는 대한민국의 서울이나 일본의 동경 혹은 미국의 뉴욕에서 일어나는 근대적 일상 속에서 대한민국과 일본(혹은 미국), 대한민국과 아시아(혹은 북한) 여러 나라라는 근대적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로 되풀이 된다. 국가와 국가, 혹은 대륙과 대륙의 근대적 관계가 만드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그 속에 살고 있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든다. 이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지배자이든지 피지배자이든지간에 서로서로의 삶을 파괴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관계이다. 그러나 <비우티풀>에 등장하는 유스발처럼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서로서로 죽이는 삶이 아니라 서로서로 살리는 삶이 아름다움을 생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생의 삶은 유스발처럼 근대적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근대가 만든 소수자들, 즉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여성, 어린이, 불법이주민 등등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백인 남성 유스발의 아프리카인 되기, 아시아인 되기,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불법이주민 되기가 아름다운 것처럼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는 코리안 남성의 소수자 되기는 탈근대적 아름다움을 생성시킬 것이다.

근대적 지식의 미학은 아름다움을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한정시킨다. 그러한 근대적 지식은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문학을 재단하거나 영화를 재단하여 문학을 죽이고 영화를 죽인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근대적 지식의 미학이 규정하는 것과 같은 형식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철학적 개념의 선(good)이나 과학적 관찰의 진실(truth)과는 달리 예술적 창조의 아름다움(beauty)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적 아름다움은 항상 새로운 철학적 개념과 새로운 과학적 진실을 만드는 토대이다. 이러한 예술적 아름다움의 새로움이 곧 생명이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된 미술이나 음악의 생명력을 보라! 따라서 생명의 힘은 저 들판의 나무나 풀이나 바람을 아름답게 생성시키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생성시킨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생성시키는 생명의 힘은 <비우티풀>의 유스발처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 즉 근대의 권력구조가 만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empowering force)"이다. 유스발이 생명의 아름다운 힘을 불어넣는 흑인 여성과 그의 딸과 아들은 유스발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아름다운 힘을 통하여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아름다운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러한 아름다운 생명의 힘이 근대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탈근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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