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화요일) 애슐리 페리항의 밴스 아일랜드호에서 250명 가량의 건강한 니그로들을 판매합니다. 곡물해안과 와인드워드에서 막 도착한 이들은 마마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됐습니다. 찰스타운의 주민들과 접촉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오가는 배도 없어 질병에 걸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노예무역이 한참이던 19세기초 미국의 찰스타운에 나붙은 광고다. 무공해 채소나 광우병 걱정이 전혀 없는 소를 파는 것 같다. 1862년 오늘 미국과 영국은 그런 노예무역을 금지하기로 조약을 맺는다. 신대륙 개발이 한참이던 1530년대부터 시작된 노예무역의 최대 공급자와 최대 수요자가 일단 이를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한참이었고 그 화두의 하나가 노예해방이었으니 노예무역을 금하기로 한 것은 하찮은 끝내기 수순 같으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도주의를 넘어 세계경제사의 한 획으로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한 데는 노예무역도 큰 변수로 작용했다. 당시 영국군의 사령관으로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데 수훈을 세운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해적으로 유명하지만 그에 앞서 노예무역상이었다. 그가 카리브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해적질을 한 것이 전쟁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스페인의 노예무역을 방해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해적인 그가 작위를 받은 것도 무적함대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서만이 아니라 노예무역으로 영국을 살찌게 해서였다.
원래 해적 수준에서 시작된 노예무역은 신대륙의 개발과 함께 점차 기업화됐다. 영국 등 유럽국가들은 아프리카에서 직물 등 공산품을 팔아 그 돈으로 노예를 사고 그 노예를 신대륙에 팔아 면화와 사탕을 사서 유럽에 파는 삼각무역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노예를 사냥하기도 하고 토착 사냥꾼에게서 사는 것이 그 첫 단계였으나 사들인 노예를 신대륙까지 싣고 가는 것도 큰 일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1인당 180×40㎝의 공간에 촘촘히 실린 고통은 노예의 몫이지만 마마 같은 전염병이 돌아 사업이 망치면 선주가 슬피 울어야 했다.
그러나 평균 절반이 항해중에 죽어도 수지는 맞았다. 무사히 도착한 노예도 곧잘 죽었으나 노예를 부리는 농장은 수지가 맞았다. “흑인은 농장의 활력이다. 밀짚 없이 벽돌을 만들 수 없듯이 노예 없이는 설탕을 만들 수 없다”. 1764년 브리스톨의 설탕상인 존 피니가 말했듯 사탕산업에서 노예는 필수품이었고 그들은 ‘시설재’가 아니라 벽돌의 밀짚처럼 ‘소비재’였다. 설탕 1t 당 노예 한 명이 소비됐다.
그래서 노예무역을 금하자는 소리는 18세기부터 들렸으나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33년 영국의회가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해도 노예무역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예를 상자 속에 감추어 들여오는 바람에 숨쉬기도 어려웠다. 흑인들이 문명세계에 온 것을 야만인들에게 축복을 베푼 것으로 보는 것도 숨막히는 일이었다.
그런 시각은 노예무역이 사라진 뒤에도 아프리카 식민지를 지배하는 백인들의 사고 속에 남아 있었다. 그 식민지들이 해방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진국의 공장으로 노예노동의 길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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