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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亡國史’ 한 세기/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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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亡國史’ 한 세기/6월 6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32>

대전의 한 열쇠공이 베트남의 가난한 소녀를 돕고 있다고 한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열쇠와 도장을 파는 유영수씨(44)가 월 1백만원 안팎의 수입에서 3만원씩을 보낸다. 그가 30년 전 한 미국인에게 3년간 도움을 받은 것을 남에게 보답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베트남을 잇는 그 인간애로 한 세대 전 그 세 나라가 얽혔던 악연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다.

베트남이라면 어두운 기억으로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 나라는 한 세기 전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1884년 오늘 베트남이 프랑스와 후에 조약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이 그 계기다. 조선에서 프랑스의 침략을 지지하거나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그 해 겨울의 갑신정변을 앞둔 조선도 코가 석자나 빠져 있었지만 그보다도 베트남이 달나라처럼 멀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베트남이 1907년 ‘월남망국사’가 출판됨으로써 부쩍 가깝게 다가왔다. 이 책은 중국의 개혁사상가 梁啓超가 일본서 만난 베트남 망명객 巢南子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을 개화사상가 玄采가 번역한 것으로 국한문 혼용과 한글판의 두 가지로 나왔다.

물론 그것은 ‘베트남의 책’이 아니었다. 그 책에 “조선인의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이다”라는 말이 들어 있듯 그것은 ‘조선망국사’ 같은 것이었다. 일제가 1909년 이 책을 ‘치안방해’라며 압수해 태워버린 것도 그렇다. 월남망국으로부터 20년이 지나는 동안 조선도 사실상 망해 양계초가 그 책을 쓰던 해에는 베트남과 프랑스간의 후에조약 같은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베트남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까마득히 먼 나라 같지만 망국의 과정은 의외로 비슷하다. 베트남은 10세기에 독립을 했지만 형식상 중국이 종주국 행세를 한 것이 우선 우리와 비슷하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뺏던 해의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일제는 이미 중국의 종주권을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렵 '독립문‘이나 ’독립협회‘ 등 부쩍 쏟아져 나온 ’독립‘이라는 말도 그런 것이다. 당시의 개화파들이 알았건 몰랐건 일본에게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자 주인 바꾸기였을 뿐이다.

그 뒤 오랜 동안 잊혀졌던 베트남에 대한 관심은 1947년 박인환의 시 ‘남풍’으로 이어진다.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자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꾸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박인환의 가슴팍으로 스며들던 남방의 향기는 그 3년 뒤 한반도의 회오리바람에 끊어지고 만다. 차라리 영원히 끊어져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를 듣지 못했으면 좋았으련만 찾아가서 그 총소리를 잠재우려 맞총을 쏘았다.

그러나 ‘월남망국사’는 곧 끝난다. 그리고 이들보다 늦게 시작된 ‘조선망국사’는 먼저 끝난 것도 같고 분단이라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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