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오늘 새벽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을 인민해방군이 장갑차로 급습한 사건은 14년이 지난 이제 꽤나 잊혀진 일이 됐다.
당시 20대 후반으로 바둑이다 두던 루이나이웨이와 장주주는 나라를 쫓겨나 10년간 세계를 전전하다시피 했으나 4년전에는 한국기원 기사로 정착했다. 특히 40세의 중년부인이 된 루이나이웨이는 중국의 프로바둑 허난(河南)팀 기사로 중국을 오가니 사실상 귀국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장갑차로 깔아뭉개고 총을 쏜 사건이 잊혀지기에는 14년 세월은 너무 짧다. 그 40년 전 중국인민해방군이 톈안먼을 들어설 때의 기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다. 그‘해방군’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그들은 베이징 시민들의 환영을 받기에 바빠 총을 쏠 겨를도 없었다.
그처럼 환영을 받고 중국을 석권한 공산당이 지난날의 국민당처럼 부패하자 이에 항변하는 젊은이들은 40년 전의 그 인민해방군과 어디가 달랐을까.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이들에게 총을 쏘아 국외로 내쫓거나 가두거나 침묵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칫 제2의 톈안먼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톈안먼의 베이징과는 거리가 먼 쾅퉁에서 그 비슷한 것이 터지고 말았다. 사스 사태다.
물론 톈안먼 사태와 사스 사태는 얼핏 비교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 톈안먼 사태라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탱크고 사스라면 떠오르는 것은 병원과 마스크로 그 둘은 전혀 딴판이다. 살상과 구명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비슷한 데가 너무 많다.
톈안먼 시위에 참가했던 젊은이들의 가장 큰 요구사항의 하나인 언론의 자유가 아직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어서다. 당국은 지난해 11월부터 쾅퉁 일대에서 사스가 생겨나도 언론통제로 이를 가렸고 3월에는 베이징에서도 발병자가 생겼으나 4월 3일에야 이를 시인했다.
그래서 톈안먼 사태 때는 1백명이 죽었으나 사스로는 전세계에서 7백여명의 희생자를 냈으니 더 큰 사건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물론 두 사태의 의미를 희생자의 숫자로 잴 수는 없으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외신보도를 당국과 관제언론이 유언비어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마스크를 한 시민들로부터 경찰이 마스크를 뺏는 것은 14년 전의 중국을 보는 기분이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당과 정부가 진정으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겠다면 언론자유와 참정의 자유를 달라고 했으나 받은 것은 총알이었고 지금도 인민은 ‘생명’과 ‘경제’ 사이에서 강제로 경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외국인들이 달아나 경제를 망치게 되며 경제번영에 불리한 것은 진실이라도 덮어 둬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톈안먼 사태로 중국의 지도층이 일대 폭풍을 맞았듯이 이번 사스도 중국의 정치에 바람을 일으키리라는 분석이 있다. 지난 3월의 제10기 전인대를 계기로 출범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체제가 빨리 정착되리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도 군사위 주석자리를 갖고 수렴청정을 하는 장쩌민의 지도력이 급격히 퇴진하리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비밀주의도 장쩌민측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이를 뒤늦게 안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앞장서 사스와의 투쟁을 벌였고 그것은 한낱 전염병의 문제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중국의 통치가 보다 투명하고 민주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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