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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보다 큰 조연 앤서니 퀸/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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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보다 큰 조연 앤서니 퀸/6월 3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29>

아카데미영화상에서 남배우건 여배우건 주연상과 조연상 수상자가 받는 오스카상의 무게는 같다. 26㎝의 높이에 3㎏ 무게의 금빛 입상이다. 주연상은 속까지 금이고 조연상은 도금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청동조각에 금을 입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금과 은으로 구분되는 올림픽의 메달과 다르나 일반인의 눈에는 그 비슷하게 비친다. 주연상은 금메달 같고 조연상은 은메달 같으며 은메달 두 개보다 금메달 하나가 더 값이 나가듯 주연상이 조연상보다 두 배 이상으로 커 보인다.

그러나 이런 통념이 머쓱할 때가 있었다. 재작년 오늘 앤서니 퀸이 86세로 숨지자 그가 60년 영화인생을 통해 150여 편에 출연했으나 주연상은 받은 적이 없고 조연상만 두 번 받았다는 사실이 다시 알려졌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주연보다 위대한 조연이라고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앤서니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당시 그가 조연이었던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다. 가령 40년 전에 '나바론 요새'를 본 이들에게 미남 주인공 그레고리 펙은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바론 요새를 폭파하러 간 특공대들이 독일군에 붙들리자 간질환자처럼 발광을 하다가 기습을 하던 앤서니의 넉살좋은 연기는 잊을 수 없다.

앤서니가 죽자 어느 주연 못지않았던 그의 여성편력이 새삼 화제가 됐다. 5명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남겼다는 말도 있고, 6명과의 사이에서 14명의 아이를 남겼다는 말도 있고, 그 이상이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게 됐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80세에 난 딸을 귀여워하던 모습이다.

바로 그런 엽색행각을 너무 떠들다 보니 앤서니의 일생이 겪었던 영화보다 진한 드라마는 가려진 느낌이었다.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아일랜드에서 멕시코로 흘러들어온 이민이고 어머니 마누엘라는 농장에서 일하는 인디오 여자를 지주의 아들이 건드려 태어났다. 이들 밑바닥 인생의 남녀는 1910년대 초 멕시코 북부를 흔든 판초의 혁명군에서 만나 1915년 앤서니를 낳는다.

이들은 아들이 태어난 지 8개월 뒤 군용열차 석탄더미에 숨어 미국 LA로 오고 그 곳에서 철이 든 앤서니는 혁명은 모른 채 신문팔이와 구두닦기를 배운다. 그러나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끝에 배우가 된 그는 다시 혁명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멕시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일대기를 그린 '혁명의 사파타'에서 동생 유페미오역을 맡아 1952년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는다. 그 해의 주연상은 '하이 눈'의 게리 쿠퍼.

그러나 이 조연상은 그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혁명의 사파타'에서 혁명가인 주연 에밀리아노 역은 순백인 말론 브란도가 맡고 잡종백인 앤서니는 혁명의 대의도 모르는 건달 같은 역을 맡은 것이다.

비단 이 영화가 아니라도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베드윈족의 추장이 되거나 '길'이나 '노틀담의 곱추' 같은 데서 밑바닥 인생으로 익숙하다. 그래서 매카시즘이 한창일 때 백인출신의 레이건이 좌파 영화인들을 한참 쫓을 때 그는 도망치는 쪽이었다. 그는 운명적으로 조연인 셈이고 그 연기를 확실히 잘함으로써 주연을 능가하고 백인을 능가하는 연기자로 자리매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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