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한국의 재발견’-. 지난해 오늘 시작된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평한 것이다. 여기서 ‘발견’은 외국인의 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16강 진출에 목말랐던 한국이 4강에 올라서가 아니다.‘공은 둥근 것이다’는 말처럼 축구의 승부에는 이변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겹칠 수도 있는 것이다.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을 붉은 악마의 티셔츠로 물들일 만큼 열기를 보여주어서도 아니다. 유럽에서 살인적인 패싸움을 일삼는 훌리건들이야말로 열성이 뜨거운 ‘진짜 악마’들이다. 붉은 셔츠가 거리를 메우는 것은 지난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붉은 악마의 자랑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그것처럼 통제되지 않아도 통일돼 있고, 훌리건처럼 열성적이면서도 평화로웠던 점이다. 한국이 독일에 질 때도 붉은 악마들 사이에서 독일인들이 구김살 없이 승리의 기쁨을 누린 것이 그렇다. 그래서 아직도 ‘스포츠=폭력’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스스로가 놀랐다.
우리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순간이었고 그 기억은 월드컵 4강의 감격이 가신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뒤 그 광화문에서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시위가 열기를 띤 배경에는 그런 자랑과 사랑의 기억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4강을 넘은 셈이나 이에 턱없이 못 미친 대목도 없지 않다. 우선 지난 4월 16일 안방인 상암경기장에서 대표팀이 일본대표팀에게 졌을 때 ‘4강’은 너무 실감나지 않은 것이 됐다.
히딩크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팀 감독을 맡지 않으려 하는 것은 더 아프다. 서울 월드컵의 영웅으로 승리의 신 같은 그의 기량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가 맡지 않으려 하는 배경이 더 아프다. 그가 네델란드의 방송에서 “한국인들의 기대가 너무 높아 맡기 어렵다”고 한 데는 스포츠를 보는 한국인들의 문젯점이 드러나 있다.
지난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해 국민들의 입맛은 높으나 2006 월드컵에서 16강 진출도 버거운 것이 오늘날 한국축구다. 지난 월드컵에서 16강에 머문 일본과의 최근 경기에서 진 것은 그 한 단면일 뿐이다. 지난번 월드컵의 주전들 대부분이 고령으로 다음 월드컵에서는 갈아야 하고 그 결과는 미지수다.
축구문화도 히딩크 이전과 크게 달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히딩크가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 등 강팀과 연습경기를 하다 지자 그가 선수들의 사기를 꺾었다고 비난했던 매스컴들의 냄비근성도 사라진 것 같지 않다.
다만 히딩크가 다시 오면 뚜렷히 좋은 점은 하나 있다. 감독이 선수를 선정하는 데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히딩크를 통해 그 점에 눈을 떴으면 우리는 지난날의 ‘죽은 감독’들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가령 차범근을 또 다른 차범근으로 맞을 수 있다. 한 차범근은 축구계의 ‘어르신’들이 선수를 선발할 때 복도를 서성거리는 심부름꾼 감독이고 다른 차범근은 자신의 안목에 따라 선수를 뽑아 자신의 작전에 따라 훈련시킬 수 있는 ‘차딩크’ 같은 감독이다. 그런 것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우리는 코엘류에게 히딩크의 권위를 주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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