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오늘 텔아비브 로드공항의 적군파 사건은 이제 잊혀진 사건이다. 적군파들이 기관총과 폭탄으로 민간인들을 25명이나 죽이고 40여명을 다치게 한 사건의 내용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 아니다. ‘적군파’(赤軍派)라는 말 자체가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적군파에는 ‘일본 적군파’와 ‘서독 적군파’가 있었다는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적군파 3명이 멀고 먼 이스라엘까지 와서 자기네와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자기네도 자살하듯 죽은 것은 지난 세기의 한 광란으로 빨리 잊고 싶어한다.
그런 사건이 새 밀레니엄이 돼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적군파가 다시 부활해서가 아니다. 2000년 11월 8일 일본 적군파의 보스인 여전사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ㆍ58)가 일본에서 붙들림으로써 이미 식물조직이던 적군파가 공식으로 해산해서다.
시게노부는 71년 적군파 동료 18명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도우려 중동으로 가 PFLP(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와 제휴해 레바논에 ‘적군파 아랍 지부’를 세웠으나 로드 공항 난사사건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로 전해 그와 결혼한 동료 오쿠다이라(奧平)는 여기에 참가해 죽었다. 이들 3명 가운데 1명은 전사하고 다른 1명은 자살했고 오카모토 고죠 1명만이 적군파의 대의를 선전하기 위해 체포됐다.
오카모토는 훗날 석방돼 레바논 여인과 결혼해 한동안 그곳에서 고군분투했으나 요즘은 행방도 아리송하다. 걸프전쟁이래 레바논은 적군파들이 혁명을 추구하기는커녕 살 곳도 못 됐다. 시게노부도 중동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일본에 돌아온 바람에 붙들렸으나 일본에서도 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체포된 직후인 11월 20일 일본 공산당이 혁명을 추구하는 계급정당을 포기하고 국민정당으로 거듭나기로 결의한 것도 그렇다.
그러나 세기의 여전사 시게노부의 이야기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재작년에 내논 자전적 수기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가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너’는 그가 73년 3월에 낳은 딸 메이(命)를 말한 것이어서다. 시기적으로 메이는 로드 공항에서 죽은 남편 오쿠다이라의 딸이어야 하나 그는 아랍혈통이었다.
그럼에도 ‘命’은 로드 공항에서 죽은 오쿠다이라 등 동지들의 목숨과 ‘혁명’을 기념하고 자신의 새로운 생명을 맡긴다는 의미였다. 사과나무 아래서 낳기로 했다는 것도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팔레스타인 혁명전사와 몸을 섞어 임신한 그가 어느날 사과나무 밑에서 회의를 하던 중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고 출산허가를 받은 것이다.
이 책의 놀라움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여전사라는 비정한 외형의 시게노부의 내면에 감추어진 눈물과 모성애가 속속 배어 있어서였다. 실은 이 책도 메이에게 일본 국적을 주도록 당국에 쓴 탄원서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는 붙들린 직후인 11월 16일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대국의 폭력은 영리해서 피도 흘리지 않고 확실히 돈을 벌어 들인다. 그러나 억압된 인민이 말하는 수단은 총밖에 없었다”며 그동안 무관하게 피해를 입힌 사건에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자신이 일본에서 아랍으로 가는 여정처럼 딸애가 아랍에서 일본으로 오는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메이는 2001년 3월 일본국적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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