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말 라이프지가 지난 밀레니엄의 100대 사건을 선정하면서 그 첫 번째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든 것은 의문스러운 데가 있었다. 금속활자가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나 종교개혁보다 더 큰 사건일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1972년 오늘 파리서 열린 '책의 역사' 전이 떠올라서다.
유네스코가 주최한 이 전시에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42행 성경'을 인쇄하기 70여년 전인 1377년(우왕 3년) 고려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直指)가 전시된 것이다. '직지'는 원나라에 유학했던 백운(白雲)화상(1299-1375년)이 스승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선서 '불조직지 심체요절'(佛祖直指 心體要節)을 상하권으로 증보한 것이다.
이를 백운의 사후 그의 제자인 청주 흥덕사의 석찬이 '백운화상 초록(抄錄) 불조직지 심체요절'이라는 금속활자본으로 내놓았고 다른 제자 법린은 그 이듬해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내놓았다. 파리의 그것은 금속활자본 가운데 하권으로 그것도 첫장이 떨어져 나간 데다 누군가가 붓으로 '직지심경'이라고 써놓아 지금도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그럼에도 라이프지가 흥덕사의 금속활자는 젖혀두고 구텐베르크의 그것만 아는 체한 배경은 짐작할 한 일이다. 서양에서 성경을 찍은 사건과 동양에서 불경을 찍은 사건에 대한 문화적 편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태생의 소설가 필리프 반덴베르크가 몇 년 전에 내논 '구텐베르크의 가면'을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 소설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으로 성경을 내논 것이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동기가 아니라 면죄부를 인쇄하고 성경을 팔아 돈을 벌려는 것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속물적인 동기에서 개발된 것이나 바꾸어 말하면 생활 에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금속활자는 그 후 매체의 혁명으로 이어지나 고려의 그것은 절간의 한 행사로 끝난 채 전통도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인 자신도 금속활자의 가치를 몰라 그 증거물인 '직지'마저 서양인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것은 한국인에게는 자랑스러움이자 부끄러움인 셈이다.
파리의 '직지'는 1888년 프랑스의 초대 대리공사로 부임한 플랑시가 수집한 것으로 골동품 수집가에게 넘어갔다가 1952년 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이었다. 금속활자본의 성격상 '직지'는 아마 50- 100부가 인쇄됐을 것이나 발견된 것은 플랑시가 수집한 하권 1권뿐이니 그는 한국 문화재의 적이 아니라 은인인 셈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의 규장각 도서를 강탈해 간 프랑스군의 행위도 반달리즘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당시 극동함대 사령관 귀스타브 로즈 준장이 본국의 대신에게 보낸 편지가 그렇다. "가난한 곳이어서 대신 각하께 보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왕의 거소 같은 것이 있어 책을 3-4백 권 모았습니다. 내용은 모르나 이 나라의 정체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됩니다"는 요지였다.
뜻도 모르면서 책을 훔쳐 본국으로 보낸 것이 눈길을 끈다. 물론 그것은 강도행위나 이를 잘 보존했으니 반달리즘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특히 공주박물관 같은 국립박물관이 강도에게 털리는 나라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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