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오늘 ‘평화의 댐’ 1단계 공사가 조용히 끝난다. 그 2년 전 10월 30일 북한이 금강산에 건설하고 있는 저수량 2백억t의 금강산댐을 터뜨리면 수도권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부분이 물바다가 된다는 건설부장관의 발표로 건설이 시작될 때의 흥분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댐이 착공될 때는 ‘북한의 수공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국민이 속았으나 완공될 때는 ‘민주화운동으로부터 군사정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서다.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계획을 오래 전에 알고 있던 당국이 이를 발표한 시점부터 수상스러웠다. 그 이틀 전인 10월 28일에는 건국대에서 26개 대학 1천5백명의 학생이 참가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이 결성됐고 발표 다음날에는 헬기까지 동원돼 학생들을 굴비 엮듯 잡아들였다.
금강산댐의 위협에 놀란 국민들의 불안을 업고 공사는 87년 2월 착공됐으나 그 4개월 뒤에는 6.29선언이 나왔다. 그래도 5공이 일단 착공한 이 공사는 6공에서 마무리는 됐으나 원치 않게 밴 아이가 태어난 듯한 분위기였다.
‘평화의 댐’은 군사정권이 써먹던 수많은 허위의 하나였을 뿐이나 당시 언론들의 허위성은 잊힐 수 없는 것이었다. 언론이 군사정권에 끌려 갔다기 보다 앞장서 끌고 간 느낌이었다. 총공사비(1천5백9억 원)의 절반 가까운 성금(7백33억 원)을 사실상 언론이 거두어서만이 아니다. 5공 말기의 민주화 운동에 밀린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무서운 금강산’이라는 노래를 선창하자 언론들이 더 목청껏 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뒤이어 언론은 6월 항쟁을 내내 비판하다 막상 6.29 선언이 발표되자 이를 극구 찬양했으나 ‘평화의 댐’은 아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던 일부 보수언론이 지난해 9월 금강산댐의 붕괴 위험에 대비해 ‘평화의 댐’을 증축하게 되자 그것을 건설한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다며 생색을 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수공(水攻)을 펴는 것과 자기네 댐이 사고로 무너진 것이 어찌 같은 일인가. 더욱이 금강산댐의 저수용량은 26억t으로 2백억t과는 까마득한 차이다. 금강산에 2백억t은 그만두고 1백50억t의 댐을 건설하려 해도 20t트럭 1천대가 13년간 흙을 퍼 날라 와야 하고 그렇게 댐이 완공돼도 14년간 물을 채워야 하니 설령 수공을 하려 해도 27년 뒤에나 가능한 일이나 당장 88올림픽을 치르지 못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을 두고도 시침을 떼고 있다.
그래서 한동안 남침을 위한 거점처럼 비치던 금강산은 이제 관광객이 오가고 금강산댐은 남한의 안보가 아니라 남북한의 안전을 위해 함께 걱정해야 할 사항이 됐으나 당시 언론의 보도는 오보를 넘어서 ‘예술’이자 ‘신화’로 기억될 만하다.
신문들은 금강산댐이 터지면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찬다며 그림까지 곁들였다. 63빌딩 앞 한강에는 서해의 갈매기가 날아오는가 하면 서해의 간조와 만조에 따라 수위가 달라지는 바닷가 같은 곳인데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찬다니 노아의 홍수가 따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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