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전차는 지난날에의 향수를 자아내지만 우리와의 첫 만남이 그처럼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1899년 오늘 전차사고로 어린 아이가 죽자 일어난 소요가 우선 그렇다. 그 달 4일 시운전을 시작해 20일부터 일반 승객을 받은 지 꼭 1주일만에 사고가 난 것이다.
이날 파고다 공원 앞길을 건너던 다섯 살 난 아이가 전차에 치어 죽자 아이의 아버지와 군중들이 달려들어 전차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래서 한성판윤이 사임하고 경무청 관리들이 문책을 당한 것은 물론 일본인 운전원과 종업원들이 놀래서 귀국한 바람에 8월 10일 미국인 운전원들이 올 때까지 운행이 중단됐다.
오늘날 가장 안전한 것으로 돼있는 궤도차량이 한국에서는 자동차보다 먼저 사고를 낸 셈이다. 자동차 사고는 그 2년 뒤인 1901년 세계를 순방중이던 미국의 사진가가 소달구지와 부딪힌 것이 처음이나 인명피해는 물론 동물피해도 없이 달구지만 부서진 정도였다.
그 전차사고는 ‘인재’(人災)나 ‘문화충격’ 같은 것이기도 했다. 전차가 시운전하던 날 구경꾼들이 몰려와 군인 3백명과 순검 2백50명을 동원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그 뒤에도 구경꾼들은 지방에서도 몰려 왔으나 전차운행은 원시적이었다. 차표가 없이 1구간 5전씩 돈으로 받고 정거장도 없어 손을 들면 서는 식이었다.
당시의 정황은 이튿날(27일) 독립신문에 나타나 있다. “전기거(電氣車ㆍ전차)라 하는 것이 대한에 처음 생겨나매 아직도 개명못된 인민들의 안목에 어찌 구경스런 물건이 아니라고야 하리오. 어저께 어린 아이가 죽었다는지라. 오전 9시쯤 되어 전기거가 동편에서 올라오는데 인민이 많이 몰려있다가 전기거가 종로에 당도하거늘 인민이 달려들어 이를 전복시켜 불을 놓아 태우면서 하는 말들이 전기거에 사람이 상하고 죽고…”
당시 전차를 태운 배경에는 ‘반미’의 그림자가 없지 않다. 물론 그 반미는 오늘날의 ‘양키 고 홈’과는 다른 것으로 서양 전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니 ‘반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기미는 12년 전 경복궁에 전등을 설치할 때부터 비쳤다.
당시 미국인 기술자들이 경회루 연못의 물을 발전에 이용한 바람에 물고기들이 죽자 망국의 징조라며 전기를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근대화된 학자이자 의사로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池錫永)도 사헌부 장령으로서 전등이 사치풍조라며 사용을 중단하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00년부터 거리에도 가로등이 설치되자 마치 독립군이 일본군 시설을 폭파하듯 전선주를 절단하는 사고가 빈발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과학은 사치이기 전에 편리하고 따라서 경제적이어서 대세고 강대국인 미국에 힘없는 조선 조정이 끌려가는 것도 대세였다. 전차는 사고로 한동안 중단됐으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종로-남대문 노선이 신설됐고 이듬해는 용산으로 늘어났다.
이런 전기사업을 맡은 회사는 원래 고종이 출자한 한성전기회사였으나 점차 미국의 목소리가 높아져 1904년에는 한미전기주식회사가 되더니 합방 직전인 1908년에는 일본와사(가스)주식회사가 평화적으로 인수했다. 그 때의 분위기는 알 수 없으나 부시가 고이즈미를 트럭에 태우고 직접 운전하며 텍사스 목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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