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오늘 재일작가 김달수(金達壽)가 숨진 것은 그 해 재일동포 사회에서 들려온 작은 뉴스였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가 거들떠본 소식이었다. 그 해의 진짜 뉴스는 다른 재일작가 유미리(柳美里)가 아쿠다가와(芥川)상을 받은 것이다. 문학이나 재일동포에 별로 관심없는 이들에게도 곱상한 얼굴의 유미리는 하나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재일동포 사회의 모든 것이 그렇듯 그 문학도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이따금 아쿠다가와 같은 큰 상을 받으면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하나 재일 작가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살가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문학이 일본의 대중들에게도 그렇게 비친 점이다. 재일동포들 전반이 "우리는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문학은 특히 그렇다.
그것은 재일작가 전반의 고통이지만 김달수의 경우는 두드러진 편이다. 1919년 경남태생으로 10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김사량(金史良ㆍ1914-50)과 더불어 재일작가 1세대를 이룬다. 조선어가 능숙한 만큼 차별을 많이 받고 그래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강했던 것이다.
일본의 소학교에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중퇴한 김달수는 공장잡역부 폐품수집상 목욕탕 화부 등을 하면서도 고학으로 일본대 예술과는 졸업했으나 그 자체가 소설이었다. 그가 43년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기자로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그가 훗날 발표한 소설 '나의 아리랑의 노래'로 집약될 수 있다. 그가 기자로 면담한 학병지망생은 "뭣을 쓰든지 마음대로지만 도대체 조선의 적은 어디에 있단 말이요?" 하며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그 때의 체험으로 김달수는 "태백산맥"을 쓴다. 해방이 됐다고 기뻐하던 지식인들이 점차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것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공교롭게도 해방공간에서 끝난다. 따라서 해방공간이 끝나고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터진 여순사건으로 시작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는 하나의 연봉처럼 이어진다.
김달수가 서울에 있을 무렵 다른 1세대 재일작가 김사량은 일본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갔다가 한국전쟁에서 종군작가로 죽었기에 김달수는 외롭게 1세대 작가의 위치를 지킨 셈이다.
그를 뒤이은 재일작가 2세대는 의식적으로 일본어를 쓰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72년 재일작가로 첫 아쿠다가와상을 받은 이회성(李恢成)이나 김석범(金石範) 등이 그런 세대다.
이 세대의 특성은 지난해 이회성이 발표한 자전적 수필 "이름의 역사"로 집약될 수 있다. 그가 어릴 적 살았던 삿포로에 가서 옛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그는 이회성을 "기시모토(岸本)"라는 옛날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래야 친근하다고 했다. 이회성은 그때 지금의 이름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당시로써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세월 먼길을 돌아 그 미로에서 빠져 나오려 했던가."
그런 2세대에 이어 3세대에 이르러 재일작가 사회는 크게 발전한다. 89년에는 이양지(李良枝)를 시작으로 97년의 유미리에 이어 2000년에는 현월(玄月)이 아쿠다가와상을 받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크게 변모한다. 유미리는 수상식에서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말에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성급하다. 유미리는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의 독자 사인회는 우익 테러단의 위협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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