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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전의 '지적ㆍ 인간적 미숙함'/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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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전의 '지적ㆍ 인간적 미숙함'/5월 23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20> 미 문화원 점거농성사건

지난 20일 유시민은 한총련의 5.18 사건과 관련해 '강금실 법무장관님께'라는 글을 썼다. "학생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애국적 열정과 지적 인간적 미숙함으로 뒤범벅된 집단적 행동이어서 때로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고 또한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는 요지였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왠지 오래된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1985년 오늘 73명의 학생들이 을지로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장면이다. "우리 민주학우는 전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미국 쪽의 광주민중 대학살 공범여부를 묻고 군부독재 철회를 요구하고자 미 문화원에 들어가야 했다"는 요지의 '우리는 왜 미 문화원에 들어 왔는가'라는 유인물도 소리가 되어 들리는 듯 했다.

미 문화원 사건과 이번 광주 사건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18년이라는 시차를 떠나서도 그 둘은 배경이 너무 다르다. 고문과 의문사가 상습적으로 이루어지던 군사독재시대의 미 문화원 사건이 순교자적인 모습이라면 광주 사건은 그런 피 어린 과정을 거쳐 이룩된 민주 정권을 철없이 흔드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사건의 무게도 전혀 다르다. 이번의 5.18 사건이 '경호'나 '의전'의 문제였다면 미 문화원 사건은 국제적 사건이자 우리 역사의 '신세기 교향곡'이었다. 땅에 묻힌 지 5년이나 돼 육탈(肉脫)도 끝난 듯 했던 '광주'가 무덤에서 걸어 나와서만이 아니다. 혈맹이자 군사독재의 서포터 같은 미국에 당당히 맞서 따지는 모양새였다.

물론 '미 문화원 사건'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 3년 전에는 부산의 미 문화원을 불태워 사람이 죽기도 했고 그 동기도 서울의 그것과 같았다. 다만 부산의 그것이 익명의 테러 같은 수법이었다면 서울의 그것은 정식으로 미국에 따진 것으로 '반미'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당시 학생대표들과 협상한 래빈 문화원장이 "그들의 행동을 '반미'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한 것도 그렇다.

그럼에도 그 두 그림이 오버랩되는 것은 18년 전의 주인공들이 오늘의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돼 있는 데다 더러는 이번 사건과 직접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서다. 이번 사건에 격분한 강금실만 해도 그렇다. 운동권에 온정적이던 그는 미 문화원 사건 1년 전 운동권 출신을 남편으로 맞았다. 미 문화원 사건의 재판에는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에 비친 사건관련자들은 시동생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건을 주도하던 함운경(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허인회(고대 총학생회장)도 이번 사건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사건을 조종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의원배지도 달지 못한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일 뿐이나 오늘의 정국을 움직이는 큰 변수이기에 한총련은 그들에게도 숙제로 놓여 있다.

그것은 당시 전학련 의장이었던 김민석도 마찬가지다. 함운경이나 허인회 등 동지들에 앞서 배지를 단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의 방황하는 바람에 '먼저 된 자 나중 되는' 식이 됐으나 요즘 다시 민주당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래서 또 한번 험한 조소를 듣는 것은 아직 그가 살아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고 보면 "한때는 지나친 열정에 휘둘렸고 아직도 지적 미성숙에서 해방되지 못한 유시민 드림"이라는 말은 유시민의 것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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