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알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 곳/ 밴조를 메고 나는 너를 찾아 왔노라/ 오! 수재너, 노래 부르자/ 멀고 먼 알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 곳…"
요즘은 부르는 이가 뜸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많이들 부르던 '오! 수재너'(스티븐 포스터 작곡)다. 이 노래는 포스터가 1847년에 한 청년모임을 위해 작곡한 것이나 그 2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크게 유행했다. 밴조가 아닌 곡괭이를 메고 사랑이 아닌 황금을 찾아가며 부른 것이나 경쾌한 2박자의 노래를 부르다 보면 스스로 보헤미안 같은 기분에 젖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의 알라배마는 미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주로 비쳤으나 막상 미국인들에게 알라배마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검은 주이자 선혈이 낭자해 붉은 주이기도 했다. 남북전쟁 당시는 남부의 수도였고 전쟁이 끝나자 흑인을 해치는 KKK단이 생겨난 요람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 수재너'가 국내에서 한참 애창되던 1961년 오늘 알라배마에서 흑백 분규가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버스 등 대중교통에서의 흑백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자유여행단'운동이 도화선이 됐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그 시원은 남북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리 말해서 남북전쟁은 흑인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일 뿐 '평등한 사람'이라는 보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여행단 사건이 일어나기 6년전인 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자재봉사가 알라배마 주도인 몽고메리시에서 인종차별적인 시법에 걸려 구속된 것도 흑인들이 전에 없는 차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에 없이 그 차별을 거부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파크스는 버스에서 흑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앞자리에 앉았고 운전사가 '흑인석'으로 옮기라고 해도 거부하다 구속됐던 것이다. 이에 흑인들이 승차를 거부해 유명한 몽고메리 승차거부 사건이 일어났고 법원은 몽고메리시법이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한 차례의 재판으로 사라질 인종차별이 아니었다. 그런 재판은 구속된 흑인을 석방시킬 뿐 흑인에 대한 교묘한 차별도 노골적인 폭행도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교통기관이나 편의점 등의 흑백차별을 감시하기 위해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21명의 '자유여행단' 단원들이 알라배마에 갔으나 그들도 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과 달리 폭력을 당할수록 자유여행단 지망자가 늘어나 1천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알라배마는 '오! 수재너'와는 딴판의 이미지로 세계인의 기억에 뚜렷히 남게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마침 대통령은 '뉴 프론티어'를 외치던 진보주의자 케네디였기에 인종차별의 철폐를 위한 법제는 가속됐다..
그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필연적인 대세라 할 수 있다. 자유여행단 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 여류작가 하퍼 리가 알라배마의 시골을 무대로 인종차별을 고발한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쓴 것도 그렇다. 20세기판 '엉클 톰스 캐빈'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영화화돼 한국에서도 '알라배마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는 데 여기서 흑인에 온정적인 변호사역을 맡은 그레고리 펙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왠지 반가웠다. 그러고 보면 인종차별의 온상인 알라배마는 인종차별 철폐의 봉화가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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