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이 일어난지 4일째인 1961년 오늘 윤보선이 대통령에서 하야한다고 발표한 것이나 그로부터 24시간이 못돼 이를 번의한 것은 5.16이라는 큰 역사적 비극 속의 작은 비극이자 작은 희극이었다.
그가 쿠데타를 미워한 흔적이 없는 것도 그랬다. 쿠데타가 일어난 16일 밤 방송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됩니다."라는 연설을 한 것도 그렇다. '민주주의'는 실종한 채 '반공'만 돋보인 것이 "반공을 국시의 일의로 삼고"라는 '혁명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내각책임제 아래서 실권도 없는 대통령의 '광야의 외침'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나 국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린 이한림 1군 사령관이 쿠데타에 반대해 쿠데타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이 팽팽히 균형을 맞출 때였다. 따라서 대통령의 한마디는 아슬아슬 평형을 유지하던 저울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에 충분했다.
방송만으로는 미덥지 않았던지 그는 이한림과 5명의 군단장들에게 친필서신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의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까.
그러나 윤보선의 만류가 주효해서인지 진압이 물건너 가고 18일에는 육사생도들이, 다음날엔 공사생도들이 지지데모를 벌이자 박정희의 태도는 달라졌고 윤보선은 19일 밤 8시 30분 방송에서 "원래 덕이 없는 사람이 국가원수직에 있어 국민의 마음과 생활을 편하게 못한 죄업이 크고…" 하며 퇴임을 발표한다.
그러던 윤보선은 이튿날 6시 기자회견에서 하야를 취소한다고 발표한 배경을 두고는 말이 많으나 당시 외무부측이 군인들에게 국제관계를 고려하도록 진언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마디로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을 만류하는 것으로 용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를 생판 모르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얼굴로 쿠데타를 정착시키는 역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윤보선의 소임은 또 남아 있었다. 그 해 11월 4일 박정희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내각책임제 아래서 장성 진급은 대통령과 무관했고 당시는 최고회의에서 결정하는 일이었으나 그 달 13일 미국을 방문하는 박정희는 부득부득 대통령의 손을 빌려 계급장을 다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러던 윤보선이 이듬해 3월에는 구정치인들의 손발을 묶는 정치정화법에 불만을 품고 하야하더니 이듬해의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는다. 그것은 오직 국가의 안전을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던 그가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쿠데타 세력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인지도 모른다.
그 환상이란 집권 민주당과 장면 총리는 당시의 당파싸움에서 적이었고 그 정권을 물리친 쿠데타세력은 적의 적이니 우군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우군은 군인들이니 '혁명공약'대로 곧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되면…. 많은 정치인들의 당시 행보가 그렇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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