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오늘 실시된 제3대 대선은 우리 헌정사에서 가장 맥빠진 대선이었다. 야구로 치면 마이너리그 경기가 메이저리그 경기보다 더 인기있는 선거이기도 했다. 바로 열흘전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죽어 이승만의 당선이 뻔해서 맥이 빠졌고 그 바람에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관심을 끌었으니 마이너리그가 메이저리그를 앞선 셈이다.
물론 그런 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 속을 한 꺼풀만 뒤집어 보면 거기엔 우리 정당사의 비극이 감춰져 있고 그 비극의 자욱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은 채다.
그 비극의 1차적인 주인공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과 그를 따르던 진보세력들이나 그것은 이들이 낙선했다는 말이 아니다. 조봉암은 원래 당선을 바라지 않고 나온 제3당 후보였다.
그는 오히려 신익희가 죽음으로써 자유당 독재를 저지할 유일한 야당후보가 돼 유효투표의 30%인 2백16만 4천표를 얻었으니 예상외로 선전한 셈이다. 물론 그것은 이승만이 5백4만 6천표(70%)로 당선됨으로써 쓸모 없는 기록처럼 됐으나 한국 진보세력의 가능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국민에게 과시한 것은 큰 성과였다. 그 여세를 몰아 그 해 11월에는 모든 진보세력의 중추인 진보당도 창당한 셈이다.
그러나 정치라고 호사다마(好事多魔)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것은 죽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진보당의 선전에 놀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2년 뒤에 진보당을 거덜내고 다음해 조봉암을 법살(法殺)시킨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소위 '진보당 사건'이 자유당이라는 1개 파쇼 정당만의 작품이라면 우리 역사는 다음 해의 4.19로 자유당을 몰아냄으로써 그것을 극복한 셈이다. 물론 그것으로 죽은 죽산이 되돌아 올 수는 없지만 죽산의 비극은 여운형이나 김구 등 수많은 비극의 하나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진보당 사건의 보다 큰 비극성은 자유당이라는 파쇼당이 칼을 휘두른 점보다 그 못지 않게 보수적 야당인 민주당이 묵인 및 협조한 점이고 그 기미는 이미 56년 선거에서 비쳤다.
그 선거에서 조봉암과 신익희는 야당후보 단일화에 내면적으로 합의해 선거 직전에 조봉암이 신익희 지지를 선언하는 시나리오까지 있었다고 당시의 진보당 인사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다 신익희가 급서했으니 민주당은 당연히 조봉암을 지지했어야 하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파쇼당보다 혁신당을 더 경원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당을 노골적으로 공산당이라고 비난한 이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이 요즘 신당 창당 문제로 시끄러운 것은 감회가 새롭다. 물론 지금의 민주당이 반세기 전의 그 민주당과 같은지는 의문이지만 의회에서 가장 큰 극우 보수정당에 이어 두 번째 큰 보수정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속에서 개혁신당을 외치는 세력은 당시의 민주당이 아니라 파산한 진보당의 잔해를 보는 것 같다. 놀랍게도 그런 얼굴은 수구적인 한나라당에서도 비친다. 진보당 사건이라는 역사의 혼란에서 생겨난 어지러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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