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가 '불교(不敎)'처럼 비칠 때가 있었다. 가람이 비구와 비구니, 거사와 보살 등 사부대중의 수양도장이 아니라 사천왕 같은 폭력배들의 무술도장처럼 비치던 때였다. 요즘은 불교계의 폭력이 다소 뜸해졌으나 스님이라면 수호지의 노지심이 먼저 떠오르던 시절은 먼 옛날이 아니다.
불교에서 부처는 사라지고 주먹이 설치게 된 원인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불문에 들었다 해도 기껏 중생일 뿐인 불자들이 벌이는 헛되고 헛된 일을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지난 반세기동안 불교계가 갈등과 폭력으로 멍들게 된 근인은 나름대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오늘 이승만이 "처자식을 거느린 사람들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취지로 발표한 불교정화 유시다.
이승만의 그 유시는 얼핏 지당한 것이었다. 만해 한용운처럼 처자식을 거느린 스님이 없지는 않았으나 비구계율을 지켜야 진정한 스님이라는 인식은 한국불교 1500년을 이어온 통념이었다. 그런 전통을 일제가 단절하려 불교를 일본화시킨 결과가 바로 대처승이었으니 이승만의 유시는 종교를 넘어 민족정기의 문제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배경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기독교 신자로 소문난 이승만이 불교의 일에 간섭한 것이 우선 그렇다. 이승만이 대처 제도를 일제의 잔재라며 유난히 적대한 것도 곰곰이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 무렵에는 독립투사들이 대부분 거세된 모든 요직은 친일파들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이승만은 불만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속세의 스님인 '스승'의 정상인 대학 총학장들은 대부분 친일파였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따라서 그 정화유시는 불교를 깨끗하게 하기보다는 불교계를 시끄럽게 해서 무력화시키려는 저의에서라는 주장이 나돌았다. 당시 비구승은 2백명인데 비해 대처승은 7천명으로 명분과 상관없이 실질적인 주인이었으니 그 구도를 되돌리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건만 당장 절을 떠나라고 한 것도 그렇다.
결과는 뻔했다. 아무리 대통령의 유시라고는 해도 대처승이 삶의 터전 같은 절을 순순히 내놀 수는 없어 비구와 대처승간에 절뺏기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2백명의 비구승이 1천7백 개의 절을 접수할 수는 없어 폭력배들이 끼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절은 폭력배의 온상이기도 했다. 절에 병역기피자들이 많은 것은 조선왕조 이래의 전통이고 각종 범죄자들이 많이 들끓은 것은 살인을 한 노지심을 받아 들인 중국 송나라의 절만은 아니었다.
그 끝에 비구승은 승리했으나 그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불교계가 서로 조폭을 사고 재판을 하는 데 정재가 바닥나서만은 아니다. 폭력배로 입문한 스님들이 종단의 고위직을 차지한 것이 더 문제였다. 보다 큰 문제는 그 스님들이 늙어 물러난 뒤에도 폭력의 전통이 살아 남은 점이다.
그래서 83년 비구승 신임 주지가 부임하다 비구승 전임 주지 측의 칼에 찔려 죽은 신흥사는 가람이기 전에 아수라장이었다. 그것은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못마땅해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폭력으로 영국을 물리친다 해도 우리가 키운 폭력이 우리를 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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