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齊藤實)총독의 '문화정치'가 한창이던 1925년 오늘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공포한다.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이 법이 문화정치에 어긋난다고 사이토에게 실망하거나 원망할 일은 아니다. 치안유지법은 총독부가 아니라 본국에서 만든 것이고 그것으로 문화정치가 훼손된 것도 아니다.
일제의 식민통치도 당근과 채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당근 격인 문화정치는 이상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광수 등이 일제의 품에 안긴 것은 치안유지법이라는 채찍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문화정치라는 당근에 끌려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치안유지법은 그 20년 뒤인 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옥사한 뒤에도 수개월 동안 독립투사들을 괴롭혔으나 조선통치를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 1차대전 이후의 세계 조류를 따라 전국민에게 보통선거권을 주는 등 민주화를 실시하는 데 따른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활발해진 사회주의 운동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마침 조선의 불령선인(不逞鮮人)들도 사회주의자들이어서 치안유지법은 한국에서도 요긴하고도 가혹하게 쓰였다. "…세계역사 및 문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민족문화의 유지에 노력했다…"는 막연한 혐의로 구속된 윤동주가 의문의 옥사를 한 것은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그것을 사라지게 한 광복은 너무 반가웠기에 광복=분단이라는 냉혹한 사실마저 한동안 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3년의 해방공간이 끝나자마자 치안유지법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더 무서운 얼굴로 되돌아 왔다.
죽은 줄 알았던 법이 되살아난 것도 무섭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그 법의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에 베이는 자가 바뀌지 않은 것은 더 무서웠다. 일제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을 벌여 치안유지법의 1차 대상이던 좌익들이 국가보안법의 단골손님이 된 것은 분단 때문이라 쳐도 그 법을 운용하는 자들이 주로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친일경찰이라는 사실은 소름끼친 것이다.
정부수립을 전후해 용명을 떨친 경찰간부 노덕술이나 이승만 치하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이익흥 등이 치안유지법에 따라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용명을 떨치던 특별고등경찰 출신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서운 것은 헌법은 물론 국어의 문법을 뒤흔드는 데 있다. 제1조의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라는 부분을 자신있게 해석할 수 있는 국어학자는 없다. 따라서 김대중이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악수를 한 것은 물론 이를 방송한 방송사도 북을 고무찬양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힘센 쪽이 이겨왔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일반시민에게는 불편을 주지 않으니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소리는 아니다. 일제하의 치안유지법도 독립투사들에게만 불편을 주었다.
고영구 국정원장의 임명을 둘러싼 논쟁으로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은 더 가열될 전망이다. 김대중 정권을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했던 야당이 노무현 정권을 '본부중대'로 승진시킨 것도 그렇다. 우리 사회가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가 그치기 직전에 빗살이 더 거세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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