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오늘 사망한 일본의 조우난 덴키 사장 미야지 도시오를 '가격파괴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원래 가격파괴의 본바닥은 미국이고 그 주인공으로는 62년 월마트를 개점한 샘 월튼이 맨 먼저 떠오르나 그는 왕이나 황제가 아니라 '샘 아저씨'로 불리우다 갔다.
미국은 젖혀놓고 일본만 두고 보아도 미야지에게 가격파괴왕이라는 호칭은 억지스러운 데가 없지 않다. 일본에서 가격파괴왕이라면 최대의 유통업체였던 다이에 그룹의 창시자 나카우치 이사오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다같이 '왕'으로 불리웠으나 나카우치가 왕이나 천황이었다면 미야지 도시오는 전국시대의 제후격인 다이묘(大名)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죽었거나 파산해버린 기업인들의 키재기를 떠나서 미야지에게는 특유의 '파괴왕' 같은 데가 있었다. 그는 곧잘 가격파괴를 시장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예 사업의 목적으로 보는 듯했다.
그가 외국산 화장품의 판매를 두고 후생성과 맞붙은 사건은 유명하다. 값싸게 구입한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을 싸게 팔려 했으나 후생성이 원산지표시가 없다며 못 팔게 하자 그는 상품 위에 '후생성이 못팔게 하는 상품입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리고 담당 부서의 전화번호와 함께 무료전화를 비치해 놓자 눈앞에 쌓인 값싸고 탐나는 상품을 살 수 없게 된 여성고객들의 항의전화로 담당 관리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럴 때의 미야지는 상인 같지 않았다. 업자간의 담합과 이를 보호하듯 복잡하게 얽힌 당국의 규제 위에서 조성된 고물가 구조를 깨뜨리려는 혁명적인 파괴왕이었다. 당국에 영합하기보다는 맞서는 것이 그렇고 항의전화의 경우처럼 대중을 선동하는 것도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격파괴 자체가 일종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물론 그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샤를 푸리에 등이 주장하던 공상적 사회주의다. 푸리에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사회적 부가 증가함에도 노동자들이 가난한 것을 보고 상업을 사회악으로 보았고 나름대로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다.
그 혁명이란 생산자 협동조합인 '팔랑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팔랑주는 작업장, 식당, 집회소, 극장, 도서관 등을 갖춘 이상촌으로 그 안에서 생산물을 직접 분배해 상업이 설 땅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랑주를 건설하려면 대상인 등 부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고 그들의 눈에는 팔랑주가 '이상촌(異狀村)'으로 비쳤기에 푸리에의 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 상인들이 스스로 가격파괴 경쟁을 벌여 이익을 줄이려 들었으니 지하의 푸리에는 무혈혁명이 성공했다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지난날 권력과 야합한 공급자들이 주도하던 시장이 바뀌어 소비자 주권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시장의 민주화 과정은 평화로운 것이었으나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격파괴에 나선 많은 상인들이 결국은 자기파괴로 끝난 것이 그렇다. 바로 일본의 가격파괴왕이었던 나카우치 이사오가 지난해 1월 자기의 분신인 다이에에 1조 7천억엔 (약 17조원)의 유이자 부채만 안겨 놓고 퇴직위로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듯 물러난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가격은 파괴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싸움꾼 가격파괴왕' 미야지 도시오의 말은 금언이고 그래서 이 순간도 가격은 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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