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사스'를 보면 외래어가 남발된다는 걱정이 무색하다. 원래 이름으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고 부르기가 버거워서다. 그것이 제대로 된 우리말인지 중국산 외래어인지를 따지기도 그 긴 이름을 부르려면 우선 호흡기가 멈출 것만 같다.
그래서 '사스'라는 두 글자의 병명은 편리하나 그 내면은 걱정스럽다. 의학의 발전으로 지난날의 병들이 자취를 감추는 대신 에이즈니 사스니 하는 새 병들이 나타나니 인류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당직교대하듯 새로 나타나는 병들을 맞아 새 치다꺼리를 준비하기 바쁜 것이다. 사스의 다음번 당직완장을 찬 채 대기하고 있는 병은 또 무엇일까.
보다 골치 아픈 것은 오래전에 마귀족보에서 사라진 병마가 '돌아온 장고'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천연두가 그렇다.
1980년 오늘 세계보건기구(WHO)가 퇴치됐다고 발표하기 오래 전에 천연두는 잊혀진 병이었다. 한국에서도 1960년 3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을 끝으로 천연두는 사라져 오늘날 얼굴의 천연두 자국은 나이가 50대가 넘는 이들의 인생계급장 같이 됐다.
그러나 천연두는 그처럼 싱겁게 떠나보낼 질병은 아니다. 천연두가 역사 이래 인류가 앓아 온 치명적인 병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병은 많이 있었다. 천연두는 나은 이에게도 흔적을 남겨 인류에게 '친근한' 병이라는 말이다. 이름이 유독 많은 것도 그렇다. 천연두 외에 시두(時痘) 두창(痘瘡) 마마 손님 등 그 숫자는 열 손가락으로는 어림없고 천연두를 심하게 앓은 이의 마마 자국만큼이나 많다.
그 이름만큼이나 문화에도 흔적을 남겼다. 탈춤 '진주 오광대'에서는 천연두 걸린 아이를 업은 어딩이가 치료비를 쓰려 노름판돈을 훔치고 '통영 오광대'에서는 어머니가 부정을 타서 낳은 곰보 양반이 나온다.
천연두는 그런 픽션에서만이 아니라 김구의 얼굴에도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가 서너살 때 마마에 걸리자 어머니가 침으로 농을 터뜨려 흉터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으면 상하이 임정이 보다 잘 됐을까 아니면 그가 백정과 범부를 뜻하는 '백범'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됐을까 궁금해 하면서 천연두는 친근한 병이 됐다. 물론 신파극 '홍도야 울지 마라'의 히로인 차홍녀가 천연두 걸린 소년 거지를 돌보다 감염돼 사랑에 속고 돈에 울 겨를도 없이 25세에 갔을 때 천연두는 그저 끔직한 병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질병이 사라진 것은 다소 앞당긴 밀레니엄의 행사 같은 것이었으나 그 천연두가 새 밀레니엄에 다시 나타나려 하니 당혹스럽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무렵의 탄저균 소동이 일자 천연두를 이용한 생물학 무기의 위협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천연두는 그해 11월 한국에서 법정전염병으로 다시 호적이 이어졌다.
천연두는 죽지도 허약해지지도 않은 채 미국과 러시아의 연구소에서 신체단련을 해온 것이다. 따라서 연구소라는 복마전에서 다시 나온 뉴 밀레니엄 천연두는 마마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질병은 천재(天災)나 악마의 선물이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작품 같은 데가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천연두를 팔고 대신 매독을 구대륙에 수입한 것은 차라리 애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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