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소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1952년 오늘 숨진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린이를 위한 참교육에 헌신한 운동가나 교육학자이기 전에 성녀같은 면모마저 풍기나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이나 아는 이름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가 국제몬테소리협회(AMI) 본부가 있는 제2의 고향 네델란드에서 삶을 접는 모습은 그가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몸이 아파 어머니가 걱정을 하자 그는 "어머니, 저는 죽지 않아요. 제게는 할 일이 있거든요" 라고 했다.
그 말대로 몬테소리는 82세까지 많은 일을 했으나 50년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마지막 강연여행을 했고 다음해는 아들 마리오가 AMI를 이끌었다. 그러나 몬테소리의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묘비명에서 "나의 사랑하는 모든 어린이들이 인류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고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귀족의 장군인 아버지와 교육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몬테소리는 삶 그 자체가 성공적인 예술품이다. 집안의 모든 여건이 조화돼 몬테소리라는 작품을 낳은 것이다. 그의 외삼촌인 스토파니는 밀라노대학에 기념비가 세워진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였다.
귀족이라는 배경도 한몫 했다. 여성의 의대 입학이 허용되지 않은 19세기의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왕에게 탄원해 로마 의대에 입학해 이탈리아의 첫 의사가 된 것도 서민이라면 꿈꾸기 어렵다.
물론 그것은 어느 상류사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몬테소리의 위대함은 귀족 태생의 그가 슈바이처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는 성품에 있고 그것은 선천적이다. 의대 시절 구걸하는 어머니 곁에서 평온하게 색종이 놀이를 하는 아기를 보고 감동하는 것이 그렇다. 이를테면 생명의 외경에 눈뜬 것이다.
의사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의 한센병 환자를 보살폈다면 의사 몬테소리는 정신병자와 정박아에 관심을 쏟는다. 그 가 로마의 한 정박아 수용소를 찾아간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감옥같은 수용소에서 정박아들이 빵으로 바닥을 문지르거나 그 빵을 빼앗는 등 장난을 치고 보모는 눈살을 찌푸리나 그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훗날 몬테소리 교구(敎具)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그 발견은 따스한 가슴과 예리한 눈을 가진 천재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정박아 교육으로 시작한 그는 로마대에 재입학해 본격적인 교육자의 길을 걸으나 그 길도 어디까지나 낮은 곳으로 임한다. 1907년 교육자로 첫발을 내디딘 그가 세운 '어린이의 집'은 가난한 노동자 자녀(3-6세)를 위한 유치원이었다.
그러나 몬테소리의 주된 관심은 '계급'이 아니었다. 어린이들에게는 창의력이 있으니 이를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발전하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교육이념의 핵심이다.
한국에서도 70년 운현유치원에서 몬테소리 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몬테소리는 점차 귀에 익은 이름이 됐으나 주입식 교육이 판치는 입시지옥에서 그의 이념이 자리잡기는 어렵다. 그래서 몬테소리는 값비싼 몬테소리 교구로나 알려지고 있고 그것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뜨개질을 했던 몬테소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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