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장군의 아들'을 모르는 젊은이가 드물 듯 그 '장군'이 나선 청산리 대첩을 모르는 이도 드물다. 그러나 북한의 '장군'이 주인공인 보천보(普天堡)전투는 얼마전까지 아는 이가 그만큼 드물었다. 물론 북한에서는 반대다. '장군의 아들'을 아는 이는 드문 것이 아니라 없다시피 하고 보천보 전투는 모르는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보천보 전투가 잘 알려지지 않은 판에 그 주체 비슷한 조국광복회가 남한에서 잘 알려질 리 없다. 1936년 오늘 김일성이 앞장서 만주의 장백현과 압록강 너머 갑산 일대의 독립투사들로 조직된 조국광복회는 남한에서 오랜 동안 잊혀진 이름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유격대와 조국광복회가 이듬해인 37년 6월 4일 새벽 함남 혜산군 보천면의 보천보라는 마을을 점령한 것도 묻혀진 역사가 됐다.
최근 남북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보천보 전자악단' 등을 통해 '보천보'나 '보천보 전투'라는 말은 그런대로 알려진 셈이나 아직도 조국광복회라면 광복절 무렵에 바쁜 단체로나 알고 있는 이들이 더 많다.
그러던 조국광복회가 지난해 부쩍 유명해졌다. 고교 2ㆍ3학년 교과서에 조국광복회와 보천보 전투가 실린 것이 그 하나다. 또 하나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지난 해 9월 13일자에 조국광복회원이었다는 리영화 옹의 증언을 통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회창의 선친인 이홍규 옹이 일제때 황해도 서흥에서 사상범 담당 검사의 서기로 "수많은 반일조직 성원들과 애국자들을 처형한 악질 친일주구로 기억한다"는 기사를 실어 대선국면을 흔든 것이다.
조선신보의 기사가 나간 지 달포 뒤인 10월 31일 이 옹이 별세한 것을 떠나 거기엔 우리 역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옹이 1950년 반공검사 오제도에 의해 용공검사로 구속됐듯이 좌와 우를 분간하기 어려운 혼란이 그렇다. 친일파를 매도한 기사가 남도 북도 아니고 하필이면 일본에서 나온 것도 그런 혼란의 일부다.
역사교과서에 보천보 전투가 실린 것을 두고도 말썽이 없지 않았다. 많은 보수파 사학자들이 보천보 전투는 1백명도 못 되는 병력을 거느린 중대장급의 김일성이 일본 경찰 5명이 지키는 작은 마을을 습격한 것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라며 교과서에 실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 그렇다. 물론 조국광복회도 그런 과장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일투쟁의 무게를 아군의 규모나 적군의 피해라는 잣대로만 잴 수는 없다. 잣대와 저울의 눈금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서다. 관우가 9척의 신장에 82근의 청룡도를 휘둘렀다는 말도 과장이라고 하기에 앞서 그때의 척과 근이 오늘날과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과는 다르나 일제를 섬나라 오랑캐로 깔보고 확고한 신념이 없던 이들도 참가했던 1910년대의 항전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무서워 많은 운동가들이 좌절과 변절을 거친 뒤인 30년대 후반의 항전을 비교할 수 있는 저울은 없다.
따라서 조국광복회의 주력인 갑산파가 훗날 김일성의 집권을 돕는 주력이 됐다던가 보천보 전투가 김일성 우상화의 바탕이 된 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빠진 국사는 한국판 역사왜곡이다.
그것이 햇볕정책을 타고 '상호주의'를 벗어나 교과서에 실린 것은 북한이나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기쁨이기에 앞서 남한 국민들의 눈이 밝아진 것이고 역사의 작은 '광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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