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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死神 매카시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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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死神 매카시 /5월 2일

梁平의 '그 해 오늘은'

1957년 미국의 정치인 조셉 매카시가 숨지나 세계는 크게 놀라지 않는다. 미국은 물론 세계를 반공 히스테리로 떨게 한 그는 3년전에 이미 정치인으로는 죽어 있었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백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그의 폭탄선언으로 시작된 레드 퍼지(적색분자 일소)는 국무성만이 아니라, 그리고 관리들만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을 떨게 했으나 너무 기세가 오른 그는 자충수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가 육군의 고위층까지 마녀심판의 대상으로 삼자 54년 12월 상원의 동료의원들이 비난결의를 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술꾼이던 그는 알콜중독에 찌든 나머지 49세의 나이에 저승에 갔으나 크게 애도할 일은 아니다.'매카시를 지옥의 대통령으로'라고 합창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원이 헛되지 않았다면 그는 염라대왕도 빨갱이나 파시스트로 몰아 내고 권좌를 차지했을 것이다.

문제는 매카시가 찾아 간 저승이 아니라 그가 흔들어 논 이승의 형편이다. 매카시는 갔으나 그가 몰락시킨 사람들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좌익으로 몰려 추방되다시피 한 채플린이 돌아올 수는 없었다. 47년 제국주의 전쟁의 범죄성을 파해친 '살인광시대'를 내논 채플린이 52년 자신의 자전영화 '라임라이프'의 시사회에 참석차 영국으로 떠나자 다음날 미국정부는 재입국보장을 거부한다고 통고했었다.

그러나 영국태생의 채플린이 유럽으로 돌아간 것은 큰 비극이 아니다. 보다 큰 비극은 매카시가 가도 매카시즘은 사라지지 않은 점이다.

그 매카시즘의 파문은 한국에까지 밀려와 엉뚱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50년대에 서부극을 보며 인디언들이 백인의 총에 쓰러질 때마다 박수를 치던 기억이다. 당시 한국인들이 매카시즘이 무서워서 박수를 쳤다는 말이 아니다. 매카시즘에 가위눌린 헐리우드가 인디언들을 악마처럼 묘사하는 영화밖에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인종차별의 예술은 1852년 스토 부인이 흑인의 비극을 그린 <엉클 톰스 캐빈>을 발표한 미국 문화가 한세기 이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바꾸어 말해서 스토가 한세기 뒤에 그런 소설을 썼더라면 그도 좌익으로 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 사냥에 박수를 친 것은 부끄러운 대로 소박한 기억이다. 매카시가 죽은 지 2년 뒤 독립투사이자 정치인인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 간첩으로 몰려 법살된 것은 끔직한 매카시즘의 기억이다. 그 매카시즘이 미국산인지 국산인지는 자신이 없으나 국산 매카시즘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은 더 무섭다.

이따금 정치인들이 '빨갱이' 시비를 겪는 풍토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위를 가리지 않고 언론들이 이를 보도한 것이 매카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당시 언론계는 매카시가 터무니없는 선동가인 줄 알면서도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써댔다. 그래서 매카시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가 미국 언론의 희생양이라고도 한다.

그 매카시의 망령이 저승이 아니라 한국을 배회하고 있는 듯하니 한국의 지식인들이야말로 보다 간절히 합창을 할 일이다. '한국 매카시를 지옥의 대통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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