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침공에 나선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거 및 민주화를 전쟁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고 다른 나라들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 미국의 의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같은 미국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강탈하고, 자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허울뿐인 명분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2차대전후 냉전시기동안 자유세계의 지도자를 자처한 미국은 적어도 자유세계 내에서는 진정한 세계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적이 있었다. 과연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고 보다 문명화된 세상으로 이끌겠다는, 미국의 의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프레시안 편집위원이자 역사학자인 김기협씨가 최근 펴낸 칼럼집 <미국인의 짐>은 이같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응답이다. '미국인의 짐'이란 19세기 전세계를 상대로 제국주의적 침탈에 나선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하기 위해 만들어낸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란 말에서 따온 것이다. 유럽인들은, 야만 상태에 빠져 있는 다른 세계를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스스로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유럽인의 후손으로 신대륙을 찾아 나선 미국인들도 이와 유사한 논리로 서부개쳑 등 자신들의 팽창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른바 '천명(Manifest Destiny)'이 그것이다. 미국인들은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 의무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논리다. '천명'의 이름 아래 토착 인디언의 학살도 용인됐고, 중남미 및 아시아로의 제국주의적 팽창도 정당화됐다. 그리고 2차대전 후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로 떠오르면서 세상을 다스릴 의무는 '미국인의 짐'이 됐다.
따라서 이 책은 '오늘날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사색의 발자취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저자는 '미국인의 짐'을, 자신의 이기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울뿐인 명분만으로 보지는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눠 져야 할 짐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문명발전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좋은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이것이야말로 '미국인의 짐'이다."
"미국이 보이는 병리적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걸려가고 있는 질병을 앞장서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비판과 평화운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진행방향을 총체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미국인의 짐'에 감사해야겠다."
저자는 19세기 '백인의 짐'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문명 진행 방향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문명의 주체가 상당한 범위로 확산"된 지금은 "문명 진행 방향의 근본적 반성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미국인의 짐'은 미국인이 앞장서서 지고 있는 것일 뿐, 지금의 문명세계 전체에 얹혀 있는 짐"이며 따라서 "미국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 짐이 행복의 보따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 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본래 중국사를 전공한 저자가 중국보다 미국에서 나온 연구서를 더 많이 찾아 읽은 이유는 이 짐을 함께 나눠 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짐이 왜 생긴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보아, 피할 수 없는 짐이 확실하다면 가능한 한 나도 괴로움을 덜 겪고 남에게도 덜 끼치면서 함께 지고 갈 길을 찾아" '더 나은 세상'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 책은 80년대에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90년대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이라는 화두에 대해 고민해온 한 지식인의 기록이다.
1부에는 프레시안에 '페리스코프'란 이름으로 연재해 온 칼럼들을, 2-5부에는 1997년 이후 중앙일보 등 언론에 발표했던 글을 연도 순으로 묶었다.
<도서출판 아이필드 펴냄ㆍ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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