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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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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이한 감독의 <완득이>

I. 나는 누구인가?

한 때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에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또한 20대의 나이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은 명진 스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명진 스님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화두의 작용을 한다. 명진 스님은 어머니의 죽음과 동생의 죽음이라는 삶의 위기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 들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평생의 화두로 삼은 것이다. 명진 스님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위기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하여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끈다. 그 위기의 한 모퉁이에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의 시절이 있다. 이한 감독의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유아인 분)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물론 완득이는 명진 스님처럼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영화 스크린의 이미지이거나 소설 속의 한 인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나"나 "우리"라는 영화의 관객들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는 "완득이는 누구인가?"라고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완득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영화관에 와서 이렇게 영화 <완득이>를 보고 있는 "나"나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 이한 감독의 영화 <완득이>(2011)
문제는 학교, 교회, 사회 그리고 국가는 그러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학생들이, 교회의 신도들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리고 국가의 국민들이 "나는 누구인가?"라거나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학교와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라는 기관들은 그 구성원들에 대한 지배의 힘을 잃어버린다. "나"나 "우리"는 결코 나나 우리가 속해 있는 기관들을 움직이거나 작동시키는 부속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학교와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는 나나 우리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다. 학교의 교사나 교장, 교회의 목사나 장로,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원로나 위정자들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나 "우리"를 각 기관의 부속품으로 기관화한다. "나"나 "우리"가 각 기관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거부할 때, 그들의 권력과 권위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의 담임 선생님, 동주(김윤석 분)는 학교라는 기관이 제공하는 학생들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스스로 버리고 학생들 각각의 "나"나 "우리"가 학교와 사회와 국가에 "나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도록 만든다.

동주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학생들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율학습은 학생들의 진정한 자율에 맡기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나"나 "우리"는 자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판단이다. "나"가 수많은 관계에 의하여 스스로 구성되는 것을 거부하고, 외부에 의해서 "너는 아들이다, 너는 학생이다, 너는 국민이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나"를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서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국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외부에서 강요되는 "나"는 "노예"이고, 외부에서 강요되는 "우리"는 식민지인들이다. 동주는 그러한 지배와 독재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반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학생들의 친구가 되고, 학생들의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내려놓은 교사로서의 권력과 권위를 학생들의 믿음을 통하여 다시 쟁취하게 된다. 이처럼 가족이나 학교, 사회나 국가의 관계들 속에서 권력과 권위는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기관들이나 제도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II. 다시 "붉은 악마"가 되자!

문제는 나와 우리가 소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와 학교이다. 근대 식민지의 대한민국과 그 교육제도는 "나"를 노예로 만드는 학교이고, "우리"를 식민지인들로 만드는 국가이다. 그리고 노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를 문제아나 운동권 등등의 이름으로 악마화 하고, 식민지인들에게서 벗어나 시민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자율적인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를 빨갱이라고 강요한다. 완득이는 이미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신체장애 아버지와 정신장애 삼촌과 함께 살고 있는 완득이는 이미 다른 학생들처럼 자본의 노예가 되는 교육의 장에서 벗어나 있고, 스스로 자율적인 사회와 국가를 포기하고 깡패들과 경찰들을 동원하여 스스로 자율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과 여성 등등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식민지인들의 구성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런 완득이에게 "무한한 관심을 갖고 있고, 학교의 동료들에게 숨기고 싶은 가족사와 사생활을 폭로하여 창피하게 만들고, 오밤중에 쳐들어와 아버지, 삼촌과 술잔을 기울이는" 동주는 악마이거나 빨갱이임에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수업 중에 교실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가 유치장에 갇혀 있다.

완득이는 자신의 삶에 침투해 들어오는 동주가 싫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 "제발, 동주를 죽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노예들을 만드는 학교와 사회,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식민지인들이 되기를 강요하는 국가에 저항하지 않고 훌륭한 노예나 영리한 식민지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열등감 또한 또 다른 노예이고 또 다른 식민지인이다. "나"가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와 관계를 맺는 수많은 관계들을 주인과 노예의 예속적 관계가 아닌 친구나 연인의 상호생성적인 관계로 구성해야만 하고, "우리"가 식민지인들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로 동등한 친구나 연인들로 구성된 상호 생성적인 관계들을 집단적인 무리로 연결시켜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구성시키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스스로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완득이는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주에게 감염되어 정서적으로 동화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노예나 식민지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완득이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처럼, 혹은 박지성이 축구를 하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처럼 킥복싱을 하고자 한다.

노예와 식민지인들의 특성은 주인과 식민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반면에 노예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나라들을 멸시하는 것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들에게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국가라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나라들을 악마화 하고 빨갱이의 나라라고 비난하는 것이 노예와 식민지인들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노예가 아니고 식민지인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노예가 되지 않고 식민지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악마라고 부르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악마가 되고 빨갱이가 되는 것임을 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의 등장은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 함께 삶을 즐기고, 이 나라를 식민지인들의 국가가 아닌 자율적인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등장한 젊은이들의 축제가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나 "스스로 존재하는 나라"가 되지 않으면, 수많은 자본의 노예들과 식민지인들은 온갖 수단들을 동원하여 "나"와 "우리"를 다시 노예와 식민지들로 만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붉은 악마"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시 노예와 식민지인이 되어 스스로 소멸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자본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서열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연인의 사랑을 하고 친구의 우정을 맺는 것이다. 그래서 완득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반에서 일등을 하는 윤하(강별 분)와 연인이 되어 윤하 또한 교육체제의 노예나 국가의 식민지인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담임선생 동주와 친구가 되어 아버지와 국가에 저항만 하여 부드러움을 잃어버린 동주로 하여금 연인과 사랑을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든다. 완득이가 선생이 되어 여성을 사랑하는 법을 동주에게 가르쳐주어 마침내 동주도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호정(박효주 분)이를 사랑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노에나 식민지인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상호 평등한 완득이와 윤하의 연인관계, 혹은 완득이와 동주의 친구관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둘 이상이 모이면 이미 사회이고 국가이다. 킥복싱을 하기 위하여 핫산(수디프 바네지르 분)과 친구관계가 되듯이, 완득이는 필리핀인 엄마(쟈스민 분)를 통하여 학교와 국가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 속에서 동아시아와 지구촌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III.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

▲ 영화 <완득이> 중 한 장면

지난 20세기 근대적 인간관계와 국가관계의 노예나 식민지인에서 벗어나는 길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붉은 악마"처럼 "나"나 "우리"가 스스로 과거의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명명하였던 악마나 빨갱이가 되듯이, 21세기 오늘날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길은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강요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득이는 미국인들이나 백인들에게는 비굴하게 노예나 식민지인 노릇을 하면서 같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주인이나 지배자 노릇을 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당당히 "이 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강요하는 근대의 지식에서 이야기하는 순수한 혈통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순수한 혈통을 주장하는 것은 근대적 국가관계 속에서 지배하거나 저항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회나 국가는 순수한 혈통이나 민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삶의 관계를 교환하는 문화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살면 미국인이 되는 것이고, 중국인과 결혼하여 러시아에 살면 러시아인이 되는 것이다.

완득이가 당당하게 필리핀 출신의 어머니를 옆에 두고 "이 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근대적 지식이나 식민지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근대 식민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한반도와 필리핀 그리고 동아시아가 지녔던 근대 식민지 역사를 나와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이다. 탈근대적 주체의 선언은 근대적인 노예나 식민지인들이 식민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는 "나"나 "우리"가 되는 선언이다. 이와 같은 탈근대적 주체의 "나"나 "우리"는 완득이나 동주 혹은 윤하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고, 이러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 만드는 대한민국의 학교와 사회는 노예나 식민지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교육이나 사회에서 벗어나 필리핀인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 완득이와 친구나 연인이 되는 것처럼 중국이나 북한 혹은 베트남이나 몽골과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를 만드는 교육이나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인관계나 친구관계의 사회나 국가는 마치 완득이와 동주, 혹은 완득이와 윤하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한 것처럼 남한과 북한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나 친구처럼 선생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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