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미 동부지방은 폭설(暴雪)에 묻혔다. 뉴욕에선 새벽부터 내린 눈이 하루 종일 내리다 오후 늦게야 그쳤다. 쌓인 눈 높이는 15-20cm 가량. 갑자기 많이 내린 눈으로 ‘맨해튼의 날쌘돌이’란 별명을 지닌 옐로우 택시들조차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낮 12시쯤 모처럼 센트럴 파크로 가 전부터 벼르던 설경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에, 라디오에서 테러 비상을 걸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다시 주저앉아 TV를 켜니, 부시행정부의 ‘매파(hawkish) 법률집사’로 이름난 존 애쉬크래프트 법무의 심각한 얼굴이 보였다. 애쉬크래프트 장관은 잘 알려져 있듯, 9.11사건 뒤 이른바 “애국자 법안”(Patriotic Act)을 밀어부쳐, 필요할 경우 FBI 요원이 미국 시민들의 인터넷을 들여다 보고 전화를 도청할 수 있도록 했고, 숱한 이슬람계 이민자들을 영장 없이 장기간 가두어 이른바 ‘어메리컨 드림’을 꿈꾸던 많은 가난한 이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강성 인물이다.
***후세인이 알 카에다를 부추긴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모두 같은 장면이다. 워싱턴 미 법무부청사에서의 기자회견을 ABC, CBS, NBC, Fox를 비롯한 미 주요방송들이 모두 나서서 생중계한다. 애쉬크래프트 법무에 이어 톰 리지 조국안전국장, 로버트 밀러 FBI 국장이 잇달아 등장, 30분 가량 “미국에 대한 테러리스트 위협이 심각하다(high risk of terror attacks)는 요지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내 굳은 표정들이다. 요점은 알 카에다의 테러공격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슬람 성지순례(Haj) 기간이 시작되면서 테러 첩보들이 입수됨에 따라 7일 오후부터 테러 경보를 한 단계 높인다는 얘기다.
부시 행정부가 이번에 내린 테러 경보는 이른바 오렌지(orange) 급으로 ”테러공격 위험이 아주 높음”(High Risk of Terrorist Attacks)이다. 최고 비상단계(Severe Risk of Terrorist Attacks)에서 바로 한 단계 낮은 수준으로, 지난해 9월 9.11사건 1년을 맞아 2주 동안 이어졌던 테러 주의보와 같은 급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발령 시점이다. 콜린 파월 미 국무가 유엔에서 “이라크가 (오사마 빈 라덴의 반미 저항조직인) 알 카에다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다음날(2월 6일) 부시 대통령마저 나서서 사담 후세인을 향해 ”게임은 끝났다(Game is over)며 당장이라도 이라크전쟁 포문을 열듯 공세를 펴던 바로 그 다음 날에 오렌지급 테러 경보가 나왔으니...
부시 행정부가 오렌지급 테러 주의보를 낸 것은 미 정보당국이 알 카에다 조직끼리의 교신이 활발해졌고(그래서 테러 움직임이 급박했음을 탐지했고), 이라크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반격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주장에 바탕해서다. 콜린 파월 미 국무도 지난 5일 유엔 안보리 연설에서 알 카에다 조직과 이라크를 연결시키려 애썼다.
파월 미 국무의 연설이 있고 난 다음날 미 국무부는 테러리스트들의 생화학 공격 위협이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경고했다. 이는 생화학무기를 사담 후세인이 감추고 있다는 파월의 주장과 맞물려, 미국인들로 하여금 “사담 후세인이 빈 라덴의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생화학 무기를 건네줘 미국에 대한 테러를 부추기려 한다”는 생각을 품도록, 일종의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발언이다.
그러나 알 카에다 조직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과는 거래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엇보다 두 정치세력은 성격이 다르다. 알 카에다는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부패하고 친미적인 이슬람정권을 전복하고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에 바탕한 이슬람 신성국가를 세우려는 목표를 지녔다. 이런 알 카에다의 기준으로 보면, 이라크의 집권 바트당은 너무 세속적인 (이슬람교리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는) 집단이다. 반미라는 연결고리가 있긴 하지만, 서로의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중동 현지 취재 때 확인한 사항이지만, 팔레스타인 하마스나 요르단의 헤지볼라 세력도 알 카에다와는 거리를 두어왔다.
***“No War!" "No Bloody Oil!"**
”테러공격 위험이 아주 높다”는 오렌지급 테러 경보를 들은 오후에 센트럴 파크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러나 테러경보에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공원 안에는 비틀즈의 리더였던 존 레논을 기리는 조그만 광장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 전부터 알고지내던 대학강사 하워드를 만났다. 그는 폭설로 인한 교통대란 탓에 오후에 열리기로 된 새 학기 첫교수회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공원으로 부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반(反)부시주의자인 그는 “당국은 테러주의보(abstract terror alert)보다는 대설주의보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늑대와 양치기 소년 우화를 상기시켰다. “늑대가 온다고 자주 겁을 주는 것이나, 테러가 날 거다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었다. 옆에 잠자코 서있던 그의 부인은 “왜 늑대가 미국에 오려는지, 부시 행정부가 무얼 잘못했길래 늑대가 미국인들만을 노리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며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9.11 뒤 부시 행정부는 잊을 만하면 테러경보 등급을 올려 미국인들에게 테러 위험을 경고해왔다. 그때마다 미국의 반전운동가들은 “근거도 없는 테러 주의보를 내 미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지 말라. 9.11을 미리 막지 못한 CIA나 FBI는 각성이나 하라”는 비판을 제기했었다. 지금 미국의 반전운동가들은 2월 13-21일까지 9일 동안을 “반전 저항의 주”(Week of Anti-War Resistance)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반전 캠페인을 벌일 참이다. 특히 2월15-16일 이틀 동안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규모 반전 집회를 동시 다발로 열 계획으로 분주하다.
뉴욕 맨해튼의 반전운동가들도 바쁜 모습이다. 지난 1월 18일 워싱턴에서 10만(경찰 추산, 주최측 주장은 50만)의 군중이 모였던 반전 집회 열기를 뉴욕에서 재연하겠다는 계획이다. 그 중심 일꾼들은 국제 A.N.S.W.E.R.(Act Now to Stop War & End Racism)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이 모임의 좌장 격인 인물이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램지 클라크다).
이들 뉴욕의 반전운동가들은 파월 국무장관이 유엔 안보리에서 연설했던 2월 5일 저녁, 맨해튼 중심부인 타임 스퀘어에서 1천여명의 군중을 모아 “Nor War!" "No Bloody Oil!"을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CBS, Fox, ABC 방송 등 미 주류 방송들은 이런 집회들이 열렸다는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기 일쑤다.
타임 스퀘어 현장에서 만난 메리 그린버그(여)는 9.11 뒤 그녀가 앞장 서 조직한 “우리 이름을 팔지 말라”(Not In Our Name)이라는 반전운동 단체 회원들과 함께 “Nor War!"를 외치고 있었다. 60대 중반인 그녀는 베트남전 반전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지닌 평화주의자다. 그녀의 주장은 이러하다. "부시행정부는 미국민의 평화를 지킨다는 구실을 내세워 아프간 전쟁을 거쳐, 이라크까지 전선을 넓히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명분으로든 부시의 전쟁을 반대한다. 후세인 독재를 무너뜨려 이라크 민중들을 해방시킨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권탄압국가로 악명 높은 이웃의 사우디나 쿠웨이트의 인권에 대해선 왜 말이 없나. 그야말로 석유 때문인가.”
그녀를 비롯한 뉴욕의 반전운동가들은 오늘 오후에 상향조정된 테러경보를 듣고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 모른다. “갈수록 미국민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부시가 우리 반전운동 열기(熱氣)에 신경 쓰여 재를 뿌리려드는 게 아닐까? 테러 경보로 이라크전쟁 지지율을 높이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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