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부터는 휴대폰에서 방출되는 전자파의 인체흡수율(SAR : specific absorption rate)이 홈페이지나 제품설명서를 통해 공개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작년 4월부터 1.6W/kg을 기준치로 채택하여 인체흡수율 측정을 의무화했지만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체흡수율 기준은 유럽과 일본의 2.0W/kg보다 엄격하며 미국, 호주, 캐나다와는 1.6W/kg으로 같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휴대폰 가입자는 작년 10월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3천2백32만명이다. 작년 우리나라 인구가 4천7백만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국민 4명중 3명은 휴대폰을 갖고 있는 셈이다. 휴대폰이 이렇게 보급되면서 이미 휴대폰은 우리의 문화 안에 친밀하게 들어와 있다. 심심하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날리거나 꺼내서 괜히 만지작거리는 건 이미 아주 친숙해져 있다. 그러나 휴대폰 전자파가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걱정이 마음 한 켠에 있어서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다니거나 사용할 때는 약간 불편하더라도 핸즈프리를 사용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휴대폰 전자파에 대한 소송이 있었다. 2000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사는 신경학자인 크리스토퍼 뉴먼은 1992년부터 사용한 휴대폰 때문에 암이 발생했다며 휴대폰 제조업체와 무선통신업체인 베리존(Verizon)에 대해 8억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인 피터 앙겔로스는 메릴랜드주의 42억 달러 짜리 담배소송에서 승리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에서는 휴대폰 전자파 논쟁이 제 2의 담배-폐암 소송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년 9월, 법원은 뉴먼이 제출한 증거들이 휴대폰 사용과 암의 발생 사이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졌으면 이제 휴대폰 전자파의 유해성 문제를 놓고 시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과학적인 논의로 들어가 보자.
X선이나 감마선같은 전자파는 물질을 투과하고 세포를 파괴하는 등의 강력한 효과를 내지만 휴대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는 그런 속성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런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주로 전자파로 인해 발생하는 열이 사람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하는 게 보통이며, 각종의 안전 기준치도 이에 따라 결정된다. 전자파가 갖고 있는 에너지 때문에 발생하는 열이 세포 내 분자들의 화학결합을 끊을 수 있는지가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자파가 열로 인한 효과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작년 6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는 휴대폰을 머리에 가까이 하고 사용하게 되면 혈관벽의 세포가 수축되어 해로운 분자들이 뇌로 유입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종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핀란드 레스진스키 박사의 연구결과가 보도되었다. 기존의 휴대폰 전자파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연구들은 주로 동물실험을 하거나 아니면 현상을 묘사하는 데에 그쳤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휴대폰 전자파가 열로 인한 효과말고도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한편, 휴대폰 전자파가 암을 유발하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기존의 암세포의 증식을 촉진한다는 이탈리아 과학자들의 연구도 작년 10월 ≪뉴사이언티스트≫에 발표되기도 했다. 암세포에 유럽 표준인 GSM방식의 휴대폰의 주파수와 비슷한 900MHz 전파를 쏘여주었더니 24시간 정도 지났을 때에는 20% 정도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하루가 더 지나자 암세포가 급속도로 증식하는 실험결과가 나왔다. 연구를 수행했던 피오렌짜 마리넬라 교수는 "우리의 연구결과는 휴대폰 전자파가 건강한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암세포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고 말했다.
최근 이런 증거들이 계속 발표되고 시민들의 우려가 높아지면서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전자파에 대한 연구팀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관련 학계에서도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휴대폰에서 발생되는 전자파가 인체에 해롭지 않거나 영향이 미미하다는 입장이 일반적이다.
주로 휴대폰 전자파의 유해성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했거나 실험실 내의 연구였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는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바로 받아들인다면 휴대폰 전자파의 위험성 문제에 대해 당장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워진다.
실제 인체를 대상으로 연구를 시행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과 돈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휴대폰 전자파가 암을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도 걱정하지만 그 외에도 어지러움이나 다른 신체적 기능 저하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고민이 생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것인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첨단 분야는 역시 새로운 논쟁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을 통해 인간의 성취가 얻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과거에도 위험이 존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위험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었다면 현대 사회에는 ‘경험’을 통해 위험하다는 것을 이해하거나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위험성 여부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단, 전문가의 말을 믿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들은 전문가 사회가 '정리'될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만 하는가?
겁쟁이라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편에 선다.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엉뚱한 ‘인생역전’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보고 당신은 내가 위험기피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판단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가기를 바란다. ‘한다’, ‘안한다’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더 많은 선택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나서 ....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시 고치기 쉬운', ‘하지 않더라도 ... 다시 시작할 때, 손해가 적을 수 있는’ 선택지들이 없는 상태에서 건강과 생명을 건 도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3월에 휴대폰 전자파의 인체흡수율이 공개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소비자들이 인체흡수율이 낮은 휴대폰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기준치 이하이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인가. 이번 계기는 전자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같다. 물론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된다는 게 아쉽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조금 더 겁을 주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휴대폰 단말기에서 나오는 전자파 얘기만 했지만 건물 지붕들 곳곳에 있는 기지국들에서 발생하는 전자파의 영향도 만만치 않다. 영국 시민들은 세계에서 전자파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국민이다. 오는 3월 8일, 영국 런던에서는 영국 시민들이 모여 휴대폰 기지국 및 영국의 경찰ㆍ응급 통신체계인 테트라의 안테나를 신중하게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국민행동을 개최한다. 자, 우리도 다시 한번 내 동생이 다니는, 내 딸이 다니는 학교나 유치원 옆에 휴대폰 기지국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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