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축구 팬들에겐 슈퍼볼이 있고, 야구팬들에겐 월드 시리즈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포함하여 미국인들에겐 “유니온 어드레스(Union Address)”가 있다. 대통령이 의회에 나가 하는 이 신년 국정 연설이 미국민들에게는 흥미진진한 행사이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나 아카데미 시상식 날 저녁에 친지, 친구들이 모여 함께 맥주와 팝콘을 즐기면서 TV를 보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면서 미국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것이 이 유니온 어드레스인 것이다. 국민적 관심사를 약간 과장한다면, 슈퍼볼 게임을 전후하여 방송하는 광고물들의 단가만큼이나 높은 광고가 붙어야 할 정도이다.
1790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유니온 어드레스는 토마스 제퍼슨으로부터 “speech from the throne”, 곧 의회 개폐식 때 왕이 내리는 칙유 같은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역대 대통령들에 의해 한 시기를 정의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장으로 활용되었고, 그들의 연설문 중 적잖은 것들이 후대에 명 연설로 기록되어져 왔다. 그중에서도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유니온 어드레스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이다.
언론 매체들은 어드레스가 나오기 두어 주전부터 바짝 긴장 태세에 들어간다. 어떤 연설이 나올지 예측하고, 국민들에게 쉴새없이 연설 날짜를 예고한다. 이번 연설을 고대하던 미국인들의 관심은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던 이라크ㆍ북한ㆍ이란을 다시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검은 그림자 속에서 헤매고 있는 미국 경제를 살릴 복안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28일 밤 8시,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부 장관을 제외한 내각 임원 전원이 모습을 나타낸 가운데 부시가 의회에 등장하자 장내를 메운 의원들과 하객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였다.
부시는 한 시간이 넘는 연설을 하는 동안 서른 여섯 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단상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공화당 멤버들이 서른 여섯 번을 꼬박 일어서는 동안 오른편에 있는 민주당 멤버들은 대단히 간헐적으로 일어섰다. 유니온 어드레스에서 ‘즐길 수 있는’ 진풍경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한쪽은 연설 내내 환호를 하고 휘파람까지 불지만, 다른 한쪽은 초상난 집처럼 잠잠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3년 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설하던 때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퍼스트 레이디 로라 부시가 앉아 있는 자리에 여덟 번이나 앉아 있었던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 의원은 미소 없는 얼굴로 두어 번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다.
사용하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고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들어 온 부시의 이번 연설은 “깜짝 놀랄 일”이었다. 부시는 더 이상 “슈러브”(shrub, ‘아버지 부시 나무의 그늘 밑에서 자라는 관목에 불과하다’는 민주당 출신 전 텍사스 주지사이며 여성정치인 앤 리처즈의 발언에서 유래)가 아니었다. 비록 트레이드마크인 한쪽 입술 물어뜯기나 피식 웃음은 여전했지만 안정감 있는 태도는 ‘흠잡고 실망할 태세’를 하고 있던 반 부시 논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연설이 끝난 뒤 많은 논객들에게서 나온 첫 마디가 “surprising!”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부시를 빛나게 한 것은 연설문 자체에 짜임새 있고,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이며, 휴머니즘을 내포한 문학적 아름다움이 잘 드러났다는 점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연설의 전반부는 미국 내 문제, 곧 학교, 세금, 경제, 의료, 에너지, 낙태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졌으며 후반부는 예상했던 대로 대 이라크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그런 뒤 미국민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지막 몇 문장에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움을 곁들였다.
그런데 더 들여다보면, 논객들과 민주당파들이 왜 놀랐는지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그가 2000년 선거기간 동안 주장했던 자신의 정체성, 곧 “compassionate republican(온정적인 공화당원)”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것이었다. 미국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민주당 의원들을 일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에너지에 관해 언급한 것은 환경 보호에 관해 민주당만큼 적극적이지 않은 부시가 내놓은 깜짝 멘트였다.
둘째는 그의 연설 속에 “휴머니즘”이 있다는 점이었다. 연설에 휴머니즘을 담아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특기’였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어떤 정책을 주장할 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서에 호소를 한다면, 공화당은 국가의 안전과 이익이라는 실리적 명분을 제시하는 데에 주력한다. 그런데 부시가 국내 문제에서 이라크 문제로 넘어가는 연설의 연결 고리를 아프리카가 직면한 AIDS 문제로 삼은 것은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언급이야말로 논객들에게는 가장 큰 “깜짝 발언”이었을 정도로 의외의 것이었다. 그런 뒤 이라크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 나라 국민들에게 “자유를 약속한다”고 하는 등 온정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time to end the suffering of the Iraqi people”이라고 하여 사담 후세인과 그의 국민들을 분리시킨 것이다.
셋째는 대 이라크전의 명분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구체적 증거’(?)들이다. 부시는 CIA 정보들을 근거로 이라크가 화학전을 할 능력이 있다는 등 이유들을 제시했다.
넷째는 ‘악의 축’ 중 한 국가로 관심을 모았던 북한에 대한 언급이 예상외로 짧았으며, 북한을 더욱 자극할 만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신에 “남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은 김정일 정권의 “협박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는 점을 재확인하여 장내 기립 박수를 받았다.
연설이 끝나고 부시가 장내를 빠져나가자마자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분석 토론에 들어갔는데, 민주-공화 모두 부시의 연설 자체가 빼어났음에는 공감했으나 내용을 평가하는 데에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정치 토크물 ‘찰리 로즈 쇼’에 나온 slate.com 기자 마이클 킨슬리는 “sounds nice, looks good, but if illogical, not necessarily redeeming...”이라는 말로 부시의 연설을 일축했다. “듣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았지만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다면 내용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었다.
같은 쇼에 등장한 콜롬비아 대학의 알렌 브링클리 교수도 이라크 문제와 관련하여 “better job in presenting detail,” 곧 구체적으로 이라크가 위험한 이유들을 나열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유엔과 관련하여 논의는 하되 “we'll act on our own,” 곧 행동은 독자적으로 하겠다는 발언은 “쇼킹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약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들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라면 그런 발언은 솔직하게 들린다”고 우회적으로 부시를 비난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면, 부시의 연설은 훌륭했지만 내용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미국 내 문제에 대해서는 2000년 선거 때에 했던 발언들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으며, 미국 경제가 침체 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은 완전히 무시한 듯했다. 그는 오히려 미국 경제가 상승 기조를 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침체 경제에 비상구가 될 만한 어떤 정책 제안도 내지 못했다.
이라크에 대해서는 여전히 변함없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라크가 위험하다고 제시한 구체적 증거들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명분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는 “우리 군대가 어디에 가면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 국민에게 알리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부시의 연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의 근거로 중요한 두 가지는 부시가 국제 사회의 반전, 반미 정서에 대한 응답을 일절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라크를 언급하면서 국제 동맹국들의 결속을 촉구했지만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견해 피력은 없었으며, 또 중동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미 운동에 대한 응답도 회피했다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히지 않은 점은 반부시 진영을 실망시켰다.
결국 부시는 평소 그가 즐겨 쓰는 말인 “focused and clear,” 곧 명확하고 집중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밝히는 데에만 주력했다. 언론인 찰리 로즈가 그의 쇼에서 패널들에게 “악(evil)은 이라크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어요. 왜 꼭 그 나라에만 집중적으로 적용해야 할 말이지요?”한 질문도 새삼 부시의 이라크전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미국인들은 이라크전보다 미국내 경제 문제에 훨씬 관심이 많다는 최근 여론 조사 결과도 부시의 “focused”된 이라크 전쟁 준비를 막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슈퍼볼과 월드시리즈를 즐기는 기쁨만큼 관심을 모았던 부시의 2003년 신년 국정 연설이 남긴 것은 그가 결국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재확인이었을 뿐이었다. 찰리 로즈 쇼에서 브링클리 교수는 “He is black and white thinker. Very dangerous guy,”라는 말로 연설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결론지었다. “흑백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위험한 사람”이 치를지도 모를 대이라크 전의 시작은 현재로선 3월로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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