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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itisci's World!!!

Citisci의 '과학기술@사회' <1>

우선 이 칼럼 제목을 클릭해 글의 첫머리를 읽고 있을 모든 분들께 인사를 드린다. 이 공간은 앞으로 'Citisci의 과학기술@사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쟁점과 문제들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고들어 볼 생각으로 마련된 곳이다.

이번은 첫번째 글로, 구체적인 쟁점들로 들어가기 전에 연재를 새로 시작하면서 우리가 공유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다소 거창하게 들리더라도 처음에 으레 있기 마련인 호기의 발산이라고 치고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제는 다소 진부해지다시피 한 얘기로 운을 떼어 보자. 오늘날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과학기술의 세기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일상생활에 심대한 변화가 빚어진 시기였다.

굳이 어떤 한 분야의 과학기술이나 일상의 어떤 한 측면을 꼭 집어 얘기하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영향은 전면적이었으며, 오늘날의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과학기술 없이는 최소한의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그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와 같은 전면적인 변화가 많은 경우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는 또한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ㆍ환경적 문제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혹은 과학기술을 매개로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은 전쟁을 더욱 파괴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합성화학물질의 등장과 화석연료의 이용 폭증은 20세기 말에 전지구적 환경문제를 첨예한 현안으로 부각시켰으며, 생명공학의 발전은 '생물오염'의 우려와 함께 답하기 쉽지 않은 윤리적 질문들을 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과학기술의 양면성, 그것의 '빛과 그늘'은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던 단골 메뉴였다.

과학기술이 사회적ㆍ환경적 문제의 해결책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이러한 이중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주류적이면서도 가장 흔한 답변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필연적이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무언가로 그려내는 것일 터이다.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전제로 하는 이러한 관점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문제들이 사회나 윤리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미처 쫓아가지 못해'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사회나 윤리가 '지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과학기술에 '적응'하거나, 혹은 과학기술이 앞으로 '더 진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숙명론과 낙관론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사회나 윤리가 과학기술에 일방적으로 '적응'해야 하는 종속항이라고(혹은 그 역이라고도)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나 윤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혹자는 과학기술 발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야말로 순진한 낙관의 소산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의 필연적이고 무제한적인 진보'라는 관념 자체가 계몽사조기 이후에 '발명'된 역사적 산물이며, 과학기술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발전했던 시기란 눈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이미 사회적ㆍ윤리적 요인들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쓴 내용을 보고서 대뜸 '반(反)과학주의'니 '러다이트(Luddite)'니 하는 말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 듯해 그 점에 관해서도 미리 조금 말해 둘까 한다. 우리는 과학기술 발전을 맹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적 과학기술을 거부하고 전근대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과학기술 지상주의와 반과학주의(=야만주의)라는 대립구도는 마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 둘만 있는 것 같은 허구적인 인상을 풍긴다. 우리는 과학의 제도적 측면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거나 특정 과학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ㆍ윤리적 문제를 지적한다고 해서 이른바 '반과학'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특정 작가의 작품이나 장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을 '반문학'이라고 부르거나 현실정치인들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을 '반정치'라고 매도할 수 있겠는가?).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모든 것을 싸잡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편가르기를 넘어 좀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문제들에 관해 좀더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프레시안≫에 지면을 얻어 칼럼을 연재하게 된 동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위에서 쓴 관점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과학언론은 너무나 큰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보기에 한국의 과학언론은 과학기술ㆍ성장 지상주의에 너무나 깊숙이 매몰되어 다양한 스펙트럼 중 지나치게 한쪽의 의견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과학기술은 경쟁력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그려지고 있을 뿐이며, 사람들(과학기술자를 포함해서)의 일상을 규정하는 사회구조 혹은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에 관한 논의는 극히 부족하거나 아예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과학기술을 이런 측면에서만 조명할 경우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쟁점과 같은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외국의 과학언론도 이런 점에서 전혀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과학언론은 무지와 왜곡이 훨씬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크다. 이에 비하면 아직 과학언론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빚어진 '전문성 부족' 같은 문제는 어찌보면 사소한 불평에 해당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프레시안≫의 지면을 통해 한국 과학언론의 편향된 시각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공하고 주류 과학언론이 아예 다루지 않는 그늘에 가려진 측면들을 발굴해 낼 생각이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이 공간을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리며, 이곳이 과학기술의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활기찬 토론의 출발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칼럼을 매주 쓰게 될 'Citisci Group'은 모두 5인(강양구, 김명진, 김병수, 김병윤, 안성우)으로, 자연과학ㆍ공학과 인문ㆍ사회과학, 학계ㆍ연구소와 시민운동, 제도권과 비제도권, 학생ㆍ직장인과 룸펜ㆍ백수 사이의 경계를 어지럽게 넘나들고 있는 인간들의 종잡을 수 없는 집단이다. 이들은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주류적 관점에 피곤함을 느끼고 이를 갈아치울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을 모색중이라는 점에서(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는 citisci@jinbo.net이라는 경로를 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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