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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 신화 해체야말로 한일 소수자 인권운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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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단일민족' 신화 해체야말로 한일 소수자 인권운동의 과제

[수정일본사회 탐방]<7> 인권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 일본 시민외교센터 대표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쓰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일곱 번째로 일본 시민 외교센터 대표 우에무라 히데키 케이센 여자대학교 국제사회학부 교수를 만났다.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편집자>


우에무라 히데키 (Uemura Hideaki)

우에무라 히데키는 1982년부터 일본 시민외교센터(市民外交センター, Diplomatic Center for the Rights of Indigenous Peoples)의 창립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1956년 쿠마모토(熊本)에서 태어나서 케이오 대학 및 와세대 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은 복수민족, 즉 홋카이도의 아이누 민족 및 류큐지역의 오키나와 민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시점을 견지하며 일본의 단일민족의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소수자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국내외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에는 일본 국제 인권NGO네트워크(the International Human Rights NGO Networks)를 만들어 인권문제의 사회적 여론화를 만들었다. 또한, 2005년부터 유엔개혁을 위한 일본NGO네트워크(the Japan NGO Network on UN Reform)의 중심적인 활동가로 일본 정부 및 국제기구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화 및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케이센 여자대학교 국제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이 : 일본이 단일민족이 아니고 소수민족의 공동체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파장이 클 것 같습니다. 일본의 소수자 인권운동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지요?

우에무라 : 저는 1975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79년에 졸업했습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민청학련 사건 및 긴급조치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한국에서는 억압적인 정치체제가 지속된 시기였지만,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정리된 직후로 소위 6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의 계절이 끝난 시점입니다. 대학졸업 후 81년에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년에 발생한 광주사태를 일본에서 본 기억입니다. 조희연 교수님과 동세대로 일본에서 사회 및 사회운동을 고민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일본의 남쪽 쿠슈지방 출신입니다. 동경 등 중심부도시에서는 당시에도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지속하고 있었지만, 주변지역은 많이 달랐습니다. 사회운동을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구요.

저희 가족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의 하나였던 대만출신입니다. 대만에서 생활했던 일본인 가족이었고, 종전 후 귀국한 가족이지요. 할머니가 동북지역 출신인데, 메이지 유신 전후 막부들의 내전에서 패배한 지역으로 이들은 메이지 일본에서는 차별 등으로 생활이 어려웠지요(일반적으로 일본인의 해외도항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시작됨. 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와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농촌부의 잉여노동이 발생하였고, 국내외에 이민노동으로 이어짐. 1868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민을 시작으로 1908년에는 브라질 이민이 시작됨. 농촌경제의 붕괴는 농촌을 기반으로 한 다이묘(사무라이)들의 생활기반을 파괴하였고, 이후 해외이민을 솔선해서 선택함). 결국 이민의 형태로 대만으로 이주했던 것이지요.

반면 할아버지는 큐수지역의 빈농 출신이었습니다. 큐수는 대만과 거리상으로도 가까워서 역시 이주를 하셨고, 두 분이 대만에서 만나 결혼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대만을 병합(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은 후, 동년 11월 대만정벌을 시작하여 50년간 식민지정책을 실시함. 초기 대만인들의 저항이 강하였고 5년간 약 1만 명 이상이 학살당함)한 후 대량의 일본인 이주정책을 실시하는 데 이 시기에 두 분이 대만으로 이주하셨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사탕수수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일본 사회의 구별로 보자면, 지방인 쿠슈출신에 식민지 대만에서의 귀국자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집이 대만 타이페이에서 돌아왔을 때, 옆집은 조선의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귀국한 집안이었고, 그 옆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귀국한 집안이었습니다(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전 직후 해외에 거주한 일본인 약 300만 명이 일본으로 귀환하여 전국의 새로운 개척지를 중심으로 이주시켜짐. 3.11원전사태가 발생한 후쿠시마 등 동북지방에는 만주국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많았음).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지역배경을 가진 소수자 집단 속에서 함께 생활한 셈이지요. 제가 살았던 공간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식민지 지역의 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랐구요.

대학을 가기 위해 동경에 유학을 왔는데, 개인의 출신배경 때문인지 당시 중심지였던 동경의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위화감이 있었고, 말하자면 소수자적 시각에서 도쿄와 일본사회를 보게 된 것이지요.

▲ 우에무라 히데키 일본 시민외교센터 대표 ⓒ조희연, 이영채

조+이 : 한국도 사회운동에 있어서 서울 중심적인 시각이 있습니다만, 동경이 아닌 지방출신 소수자의 시점에서 중심운동을 보았을 때 어떤 인상이었습니까?

우에무라 : 일본의 대도시 지역의 사회운동을 지방출신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한마디로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미국 지지인가 소련 지지인가, 공산당 지자자인가 사회당 지지자인가의 구별이 대립의 중심이었구요. 그 목적으로는 정권을 쟁취한다는 지향성이 강했다고 봅니다. 저도 물론 정치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소수자 문제나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정치개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 정도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운동은 사실 소수자에 대한 진정한 연대의식은 부족했던 것이지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학생운동은 후퇴하고 있었고, 저희들의 고민은 어떻게 일본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을 재건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은 개인적인 배경이나 경험을 토대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거론했지요. 하지만 일본의 주류체제라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러한 인식수준은 지속되고 있고요.

인권은 개별사람들의 도덕적 마음가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인권문제를 거론해도 소수자의 사회적 권리나 공공의 제도를 바꾸려는 단계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좌익 운동진영도 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생각만 하지 실제 진정으로 깊은 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홋카이도의 아이누 소수집단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들의 문제에 직접적이고 진정 어린 연대운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홋카이도에 직접 방문을 하면서, 소수 원주민집단이 받은 역사적 처분은 일본의 '내부 식민지'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좀 더 전문적으로 관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야를 하면서 보조적으로 연대하는 소수 원주민 문제가 아니라 소수 원주민 집단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1982년에 시민외교센터를 설립했고, 이것이 저의 삶이 변화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이 : 당시 사회당 및 공산당의 주류 좌파운동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인상을 갖고 있습니까?

우에무라 : 저는 공산당과 사회당의 주류세력들이 오히려 사회운동 및 인권운동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피해자들이 당사자가 되는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과제가 요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운동의 주체 및 기준, 관심, 비전을 만들 필요가 있었지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의 비전의 제시가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제기했던 것이 인권문제였으며, 인권의 국제적 기준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국제인권법 또는 국제인권기구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누 족이 있는 홋카이도를 직접 가 보면, 그곳에서 사회당인가 공산당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양당 모두 노동자적 관점에서 사물을 해석하다 보면 소수원주민의 인권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부족하죠. 일본의 사회운동이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이념의 대립보다는 국제기구를 통한 새로운 분야에서 운동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수집단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니, 자연히 일본의 '차별부락민' 문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 문제도요.

일본사회에서 이들은 주체로서의 지위가 부정당하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이 시기부터 당사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개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도 국제적 기준에 따라서 인권을 실현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었습니다(일본은 1980년대 인도차이나의 난민 발생을 계기로 국제적 비난에 대응하여 79년에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하였고, 82년에 난민조약 가입, 85년에 여성차별 및 철폐조약을 비준하였음). 재일조선인, 부락민 운동가들이 유엔에 가서 직접 그들이 당하는 차별과 억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습니다. 일본사회에서 여론화가 어려웠기 때문에 오히려 국제사회에 제안하는 형태로 일본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할 수도 있지요.

일본의 '소수종족집단'이란?

일본은 단일민족으로 교육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소수종족집단(ethnic minority group)이 존재하고 있다. 통상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소수종족집단은 현 오키나와 지역이지만 그 이전에 류큐 왕국이 있었던 오키나와 민족, 홋카이도 및 북쪽 섬지역의 아이누 족이 있다. 또한 에도시대부터의 전통적인 차별대상으로는 한국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 차별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식민지시기 강제이주 및 자주 이주를 통해 형성된 재일코리언(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구조의 변동 속에서 하와이 및 남미로 이주한 후손들인 일본계 남미인(페루, 브라질 등),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귀환한 가족들, 32년 만주국 건설 이후 개척으로 이주하였으나 소련의 참전 이후 중국에 잔류하게 된 부인들 및 고아들, 일본인 이중국적자 등도 이러한 소수종족의 차별 문제에 속한다고 하겠다.

조+이 : 출신과 성장배경의 영향으로 소수자의 시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주류 사회 운동 속에서 인권의 개념을 형성하기는 어려웠다고 보이네요. 특히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은 그 개념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일본 인권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했지요. 패전 후 어떤 반성을 했는가가 중요한데, 일본사회는 누가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확히 추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보면 이 문제는 더욱 명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한국의 광주 민주화 항쟁과 비교를 하면, 최종적인 발포 명령자와 책임자가 누구인 가에 대해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은 국민들은 다 알고 있지만요.

일본은 광주의 진상규명 정도의 수준까지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단지 모호하게 뭉뚱그려서, 전쟁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고 나쁘다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책임에 대한 애매한 처리는 우익들의 부활을 가져왔으며, 이들은 동경재판을 승전국에 의한 일방적 재판이라는 식으로 이를 부정했지만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하였습니다. 이런 발상의 나라에서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인권문제의 해결이란 누구에 의한 차별인가를 규정하고, 차별을 만든 구조와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동경재판 이후 일본사회의 지배층부터 책임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스스로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사회운동 또한 평화운동은 매우 활발했지만, 인권의 시점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었죠. 결국 각 사안별로 개별적인 운동으로 제기하고 싸워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인권운동의 전환기는 8090년대입니다. 이 시기 일본은 난민 조약을 비준하였고(1982년),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향상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1980년대 재일코리언을 중심으로 외국인등록증의 지문날인 철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음. 지문날인은 1993년에 철폐됨. 이 운동을 계기로 재일코리언들의 법적 지위향상 문제가 활발히 거론됨). 또한 여성차별 철폐조약을 비준하고 남녀고용기회 균등법의 제정(1985년), 아동들의 권리조약도 비준(1994년)되었습니다. 아이누 문제도 사회적으로 대두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운동만 해서는 각 사회의 인권개선은 어렵습니다. 국제적 기준을 적용하자고 해도 일본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정부도 국제기준을 준수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그렇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이런 현실은 거의 알지 못하고요. 결국 점점 치열한 경쟁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소수자는 사회 내부의 최대의 희생자가 되어가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조+이 : 80년대 인권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시민외교 센터'를 설립하신 건가요. '시민외교 센터'의 설립배경과 주요활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 시민외교 센터의 설립은 80년대의 국내외의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대학원을 수료한 후 지인들과 설립운동을 시작했던 82년도는 대외적으로 독일의 녹색당이 출현한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사회운동도 정당 및 조직중심의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은 사회당이나 공산당에서 대안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저희들도 일본사회에서 새로운 대안운동에 주목했고, 큰 조직이 아닌 아주 작은 조직의 형태라도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안운동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지금으로 보자면, 대학 동기들끼리 모여서 인권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NGO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10명으로 시작했습니다. 10명이 한 달에 2000엔을 회비로 2만 엔을 모아서 사무실 운영비용으로 1만7000엔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전체 활동비로 지출했습니다. 초기의 설립 멤버들이 지금도 거의 다 남아 있습니다. 3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만, 일본의 인권운동이 후진적이어서 그런지 지금은 일본의 대표적인 소수자 인권단체로서 국제회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이 : 인권단체인데 왜 '외교'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까?

우에무라 :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 때 꿈이 외교관이었습니다. 차별받은 지역의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해 외교관이 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국가기구나 주류세계 간의 외교가 아니라, 소수자가 중심이 된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재일코리안, 이주노동자 등 소수민족들이 일본사회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과 대등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 내의 소수민족들이 중심이 된 사회집단들이 대등한 입장으로 존재하는 교류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일본의 영토 내에서 홋카이도의 아이누 민족이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있었어도,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이 지속되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봅니다. 일본 내의 여러 소수민족이 소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고 이들 간의 국가연합의 형태로 일본이 존재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한반도가 자기 나라를 가지고 외교를 지속하는 것처럼 일본 내의 소수민족의 국가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동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일본 내의 소수민족의 문제는 동정의 대상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이 : 소수자 연대활동을 통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들이 있습니까? 25년이 넘었는데요.

우에무라 : 먼저는 운동의 새로운 형태를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운동가들은 어떤 분야이든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호소하는 형태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누 족 사람들에게 일본을 벗어나 국제연합으로 직접 가서 문제 제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어찌 보면 일본인들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는 판단이기도 했고, 목표 달성에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누 족 사람들을 국제연합에 데려가기 위해서는 비행기 표, 체재비 등 막대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모금 운동을 많이 했지요.

또한,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세대 중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일본의 근대시기에 대해서 혐오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사회에 대해서 반항한 세대이지요. 일본의 전쟁 반성은 대단히 일면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전쟁의 책임문제를 전쟁 자체가 가진 파괴성의 문제나 잘못된 일부 군사내각의 책임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식민지 지배는 사실 식민지의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이지만, 자국의 국민을 억압하는 체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그러한 지배 구조를 스스로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새로운 지배구조의 정점인 미국에 맡기게 되었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처리해버렸죠. 일본의 인권문제는 바로 이러한 역사청산이 결여된 사회적 구조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본 평화공원 ⓒ이영채

조+이 : 일본의 평화헌법이나 평화운동이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하고 인권을 지키지 못해왔다는 지적으로도 들리는데요.

우에무라 : 80년대 당시 저는 일본 사회의 주류적 시각이나 사회운동의 중심세력들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국의 통치지역이었습니다. 미군의 주둔에 의해 끊임없는 인권 침해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이 있어서 전후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평화헌법에서의 평화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런 평화 헌법의 존재 또는 평화헌법이 있다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소수자와의 연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란 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의 의미만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 논리로 보자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아이누 종족 같은 소수자들은 전체 속에 동화되는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전체가 생각합니다. 평화운동의 흐름 속에서도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평화의 허구성을 스스로 깨지 못했던 것입니다.

좌파적 정당운동 속에서도 이런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우익의 운동이었기에 좌익은 이런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민족을 주장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일본의 좌파운동은 민족주의적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우익과 민족을 강조하는 논리에서는 동일 선상에 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민족 내부에서 억압받는 소수종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저는 그런 점에서 소수종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좌익운동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서구 및 외부사회에서 들어온 변혁이론을 너무 형식적으로 적용한 결과 일본사회 자체의 다양한 분석과 대안적인 전략을 세우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조+이 : 수입된 좌익이론이 현지 지역에서의 약자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네요. 사실 좌익이 국제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의 통합주의적 사고에 경도되었다는 것은 저희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류의 좌익 정당이나 사회운동이 당 중심주의나 관료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소수자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은 68혁명의 탈국가주의적 지향의 의미를 다시금 연상시키는군요.

우에무라 :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는 구조적 유형성에서는 거의 동일합니다. 특히 인종이나 종족의 프레임을 고수하는 한 억압적 구조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동아시아의 좌파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또한 관료주의적인 거대조직은 작은 조직과의 연대에서 배려가 부족합니다. 사회당과 아이누 족이 연대를 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당시의 사회당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당 같은 큰 조직은 아이누 문제 이외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다음 선거도 대비해야 하구요. 그래서 소수자 문제는 선기기간에 잠깐 관심을 갖는 주제에 불과합니다. 정책실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소수자의 집단은 거대 관료집단과의 협의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알리는 데에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그 결과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의 논리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요. 소수자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도적인 운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수자인권운동에서 본 일본의 '단일종족 신화'와 국가주의, 군국주의

조+이 : '단일종족 신화(homogeneous-nation myth)'가 일본에서는 강력한 것 같습니다. 2005년 아소 타로(Aso Taro) 일본 외상이 일본은 단일종족의 민족국가(monoethnic nation-state)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고요(아소타로 전 수상은 2005년 10월 15일 후쿠시마 현 강연회에서 '하나의 문화, 하나의 문명,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의 나라는 일본국 빼고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한국에서도 단일종족 신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국제결혼 여성에 대한 동화주의적 정책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 및 군사주의의 강화는 한일 양국에서 소수자 인권을 부단히 주변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우에무라 히데키 <단일민족>
우에무라
: 2차대전 패전 직후, 일본사회는 식민지를 다 잃은 상태에서,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책은 정당 구조 내에 다양한 소수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폐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에서조차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공산당에는 그러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1983년 이후가 되어서야, 아이누 출신은 처음으로 의회 내에 후보자를 내게 되지요.

그런데 이러한 소수자의 공간 부재는 단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권 인식이 잘못된 것에서 연유합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소수자에 대한 탄압을 해 왔습니다. 특히 지배층에 대한 저항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던 것이지요. 결국 소수자의 인권문제라 함은 단일민족의 신화에 바탕을 둔 국민적 통합 정책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자유 쟁취의 문제보다 차별철폐의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라는 것이 주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조+이 : 홋카이도 하면 영화 러브레터의 로케지였던 삿포로와 오타르의 눈으로 뒤덮인 하얀 평원을 연상하는 정도였습니다만, 아이누 족의 인권문제라는 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 1960년대부터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 족을 중심으로 아이누협회가 만들어지고, 아이누 복권운동 및 아이누 문화복구운동을 시도하게 됩니다. 1987년에는 유엔에 의해 아이누 족이 원주민으로 인정받습니다. 아이누 권리운동이 전개되면서, 84년 아이누 족이 작성한 '아이누 신(新)법안'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누 지역이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디언 문제와 유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아이누 족의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자연친화적 이미지가 일본의 대자본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특허권리를 요구하는 흐름도 있고요.

2008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류큐 민족은 오키나와의 원주민이다'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저희는 아이누 족과 오키나와 민족의 문제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국제 선언인 '더반선언'(2001년 남아프리카 더반(Durban)에서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배척 및 관련하는 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가 열려 행동강령이 채택되었다)의 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원주민 권리는 인정하면서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였다고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1999년과 2006년에 아이누 생활실태조사가 이루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2006년 '현재의 생활이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이누 족들이 '만족한다'라는 긍정적인 응답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대서특필되었던 적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이누 족의 생활현실을 왜곡하는 잘못된 조사라는 논란이 되어서, 2010년 홋카이도 대학이 다시 조사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긴장이 계속 있지요. 저는 이러한 일본의 원주민 문제는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의 극복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이누 족에 대해서

아이누 족은 일본 본토의 북쪽에 있는 홋카이도, 혼슈(本州), 그리고 주변 섬에 거주했던 북방의 선주(先主)종족과 그 자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도 분포해 있었다.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은 약 2만3782명(2006년 조사)에 이르는 것으로 추계된다. 아이누란 아이누어로 '인간'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수렵채취를 주로 하면서 하천 유역에서 부계혈통집단으로 구성된 가족이 7-8세대씩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메이지 정부는 1869년부터 에조치(蝦夷地, 일본인들이 에도시대에 아이누인들의 지역을 부르던 명칭)를 일방적으로 홋카이도로 개칭하고 사할린 지역과 동시에 개척을 시작하였다. 1870년에는 개척사를 설치하였고, 1871년에 호적법을 실시하여 아이누인들을 평민으로 편입하여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876년부터 아이누인들의 수렵활동 및 전통을 일체 금지시켰으며, 1878년부터 아이누인들을 규도진(旧土人, 옛날의 땅주인이지만 지금은 평민)이라고 통일하여 불렀으며, 북쪽 센지마지역의 아이누인들을 시작으로 강제이주정책을 실시하였다. 1886년에 홋카이도 도청이 설치되어 아이누 족 및 그들의 토지를 직접 관리하였고, 1899년에 홋카이도 구도인 보호법(北海道旧土人保護法)이 제정되어 아이누인들을 관리 및 통제하였다.

전후 아이누인들은 아이누의 권리회복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에 협회를 창설하여 차별어인 아이누가 아닌 우타리(ウタリ, 아이누 어로 인민의 뜻)협회로 통일하는 등 아이누 족의 권리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2008년 총회에서 아이누 협회로 명칭을 다시 개정). 1988년 우타리협회는 아이누 신법을 만들어서 구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며, 1992년에는 유엔본부에서 아이누대표 노무라 기이치(野村義一)가 선주민족으로서 연설하였다.

1997년 삿포로 지방법원이 니후다니 댐 건설 반대 소송에서 아이누 족들의 선주민으로서의 토지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동년에 '아이누 문화 진흥 및 아이누 전통 등에 관한 지식의 보급 및 계발에 관한 법률(アイヌ文化の振興並びにアイヌの伝統等に関する知識の普及及び啓発に関する法律)'이 제정됨으로써 홋카이도 구도인 보호법(北海道旧土人保護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2008년 일본 국회는 일본 정부에 아이누를 선주 민족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 족의 전통과 문화는 보존하는 정책을 취하지만 이들의 사회적 차별에 대한 개선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이 : 20세기 저항 담론의 역사를 보게 되면, 민족 담론이나 계급 담론이 지배적이 되면서, 소수자를 인식하는 공간이 없어지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이것은 68혁명을 거치면서 사실 그런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자 운동의 억압 속에서 계급과 민족 내부의 소수자 문제를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다수에 의한 패권의 문제가 저항 담론 내부에서도 인식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에무라 : 저도 동감입니다. 칸노 시게루(萱野茂, 19262006년, 아이누인, 아이누 문화연구가, 니부타니 아이누 자료관 설립. 아이누 출신의 첫 국회의원으로 1994년98년 역임. '일본에도 야마도 민족 이외의 민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며 국회에서 질문하기도 함)라는 아이누 족 출신이 1989년 참의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사회당 후보였지요. 주류 운동 중에서 사회당이 먼저 변화를 한 셈이지요. 칸노 씨는 아이누 언어로 일본의 국회에서 최초로 연설 하였습니다. 일본 국회법에는 아이누 언어로 연설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습니다. 일본어로 하라고 제지를 받기도 했지요. 일본 언어의 패권이 당연시되고 있음을 역으로 사회 전체에 인식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도이 사회당 대표의 자문그룹에 속해 있었기에 칸노 씨를 추천했던 것입니다. 아이누 인들은 이후 자신들의 내부에서 추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누 후보를 위한 할당 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요. 사회당만이 아니라, 다른 당들도 아이누 출신 후보를 공천해 달라고 요구를 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지요. 단지 일회적인 당선이 아니라, 아이누와 같은 소수종족이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의회진출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칸노 시게루 씨는 아주 유명한 사람으로, 사회당 자신들도 정치적 이익이 되니 추천을 했던 것인데, 아이누 출신의 국회의원이 소수자 대표로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후 의회 공천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누 쪽에서도 의원으로의 추천 자체를 거부하게 되고요. 일본인들에 의해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다시 불거졌으며, 일본인을 신용할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그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자결권과 본토복귀 사이에서 분열한 오키나와의 주민들

조+이 : 오키나와의 문제를 평화의 문제나 미군기지 반대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탈식민화의 문제로, 그리고 인민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권리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인민의 '자기 운명의 결정권'이 부정되었다고 한다면, 오키나와인들도 일본의 식민주의에 의해 그러한 권리가 부정되었다는 논리로 이해됩니다.

우에무라 : 1879년 오키나와는 인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되었고, 1972년 미국의 영토에서 일본의 영토로 반환되었을 때도 '본토귀환에 의한 해방'이라는 식으로 또 한 번의 반인민적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 및 본토인들은 오키나와 문제와 조선의 식민지 문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주장이네요. 결국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국이라고 하는 외세에 의해 부당하게 식민지 통치되고 있다는 견해로 이어지는데, 이런 견해는 사실 상당히 급진적인 것 같습니다. 결국 오키나와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데요.

전반적인 논리는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더 짚어보지요. 저는 류쿠인은 국제법상으로도 독자적인 인민이라고 주장합니다.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있고요. 오키나와 인들의 정체성 속에도 혼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진영은 미군에 의한 점령기를 미국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문제로 보았고, 그래서 평화헌법을 가진 조국 일본에 복귀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민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 주민들 속에서 오키나와는 본토 일부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미군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전략 속에 정체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는데, 미일 안보조약을 이유로 미군기지는 오키나와에 그대로 둔 채 본토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주민은 결국 본토 일본인들에게 다시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본토는 여러 번 오키나와 현의 시민을 실망시켰습니다. 중국이 오키나와와의 '국내 통상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한때 오키나와의 일부를 양도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본토상륙작전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는 1945년 전쟁 말기 섬 전체의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지요. 그러나 결국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은 독립국이 되었지만 오키나와는 미국의 영토로 양도되었습니다. 오키나와 내부에는 오랫동안 복귀 반대론, 자립론(또는 독립론), 오키나와 특별자치주론 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의 보존만을 이야기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일본 정부는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진영도 그렇게 급진적으로 나가지는 않지요. 그러나 복합적인 문제도 토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적으로 타협점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조건으로 해서 타협하는가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원리 원칙을 상호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인식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본 평화공원 ⓒ이영채

조+이 : 오키나와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 2차대전 이후 류쿠 독립을 위한 정당(류큐 독립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미군이 점령했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어서 곧 독립시켜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오키나와에 기지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죠. 초기에 미군기지 유지의 부담을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의 약속으로 주민들을 분열시킵니다. 하지만 미군정 하에서 미군기지에 의존하더라도 생활이 개선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주민들 속에서 본토 일본으로의 귀환이라는 입장이 다수를 형성하게 합니다. 왜곡된 구조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 것이지요.

한편 공산당 및 사회당 등의 평화운동과 연결된 진영 가운데는 평화헌법이 적용되고 미일안보조약이 해체되면, 오키나와의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반면, 사회당-공산당과 연결되어도 만년야당 신세이므로 뭐 특별한 것을 획득할 수 없기에 아예 주류보수정당과 연합해야 한다는 세력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민당 등 보수정당과의 연합을 시도하게 됩니다. 운동의 분열은 오키나와 주민의 분열을 가져왔고, 오키나와 문제를 더욱 왜곡시켜왔던 것입니다.

조+이 : 그렇다면 오키나와 운동이 일본본토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본토반환운동으로 전개된 것은 미국의 분열전략 또는 보수지배세력의 전략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에무라 : 그렇습니다. 2차대전 직후인 미국 점령 초기, 미국은 '류쿠'라는 말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학이 없던 시절 류큐대학을 만들었구요. 미군은 류쿠군이라고 표현했지요. 류큐가 일본 본토에 의해서 차별을 받아왔다는 역사를 분석한 미국은 '당신들은 일본 본토의 일부가 아니라 차별받아 온 류큐인이다'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유지하려는 속셈에 불과합니다.

조+이 : 일단 일본 본토에 복귀해서 미군으로부터 독립하고, 만약 본토에서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오키나와 독립교섭을 할 수 있다는 단계적 전략으로 생각하면 오키나와 주민들의 전략적 선택이 꼭 부정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우에무라 :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면 많은 비용이 들지요. 이 점은 미국도 계산했을 것입니다. 미국의 계획대로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일본은 오키나와 현을 지키게 되었지요. 대신 일본정부는 오키나와 현에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주민들에게 대규모 경제적 지원을 하게 됩니다. 미군 역시 이러한 계산에 의해서 복귀 전략을 세운 것이지요. 미일 양국 간에는 일종의 비용절감 대 일본 복귀라고 하는 교환이 이루어진 셈이고, 주민들은 그 속에서 분열된 것입니다.

조+이 : 그렇다면 오키나와 운동의 경우, 일본 본토와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집단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은 소멸하였고 이제는 체제 내적인 차별철폐운동으로 변화했다고 보아도 좋습니까. 이는 주민의 변화하는 의식 속에서 소수종족이나 소수자 집단이 향후 어디까지 집단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그 성격이 바뀌었는지요.

우에무라 :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키나와 독립운동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선 오키나와로서의 권리가 지켜지기를 개인적으로 바랍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게는 남쪽의 창문이고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통로입니다. 동남아시아와도 제일 가까운 지역이지요.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에게는 어느 쪽으로도 항공루트를 만들 권리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모두 일본 본토가 결정하고 있습니다. 독립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런 형태로 주민의 집단적 권리가 부정되고 있는 현실부터 개선되어야 합니다.

조+이 : 역사적으로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무역의 허브였는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를 그런 전략적 지역으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까? 작년은 류큐 병합 100년으로 새로운 아젠다 설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에무라 : 지금까지는 그런 정책을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키나와 현 지사가 미군 철군 이후, 오키나와를 동아시아의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 정도지요. 작년 류큐 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오키나와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는 1972년에 조국 복귀라는 논리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논리가 지배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키나와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근대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스스로 정리해야 할 시기인 것은 확실합니다.

류큐 병합과 오키나와의 식민지화

일본 본토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沖繩)에는 근대초기까지도 류큐 왕국이 존재하면서 일본과는 상이한 국가와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류큐 왕국을 강제로 폐지하고 류큐방(琉球藩)을 설치하였다. 이후 1879년에는 류큐 처분을 단행하여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류큐방을 강제로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일본의 영토로 확정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저항은 오키나와를 최후의 격전지로 선택하여 섬 주민 전체를 동원한 이른바 오키나와 전을 전개하였다. 1945년 3월 26일부터 시작되어 6월 23일에 종료된 이 오키나와전투에서 희생자는 약 24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민간인이 약 9만4000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은 오키나와 지역은 1952년 4월 28일 일본과의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본토가 독립된 반면, 오키나와는 미국의 공식적인 점령지가 되었다. 미국은 류큐 정부를 설치하여 간접통치를 하였지만 1972년 일본 본토로 복귀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오키나와는 미국의 군사기지 및 식민지로서 기능하였다.

조+이 :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의 문제나 오키나와 원주민의 문제나 일본정부의 전통문화 보존론적 입장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씀인데, 우에무라 선생은 어떤 대안적인 정책을 주장하고 계시는지요.

우에무라 : 차별은 역사 속에 있습니다. 홋카이도 원주민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1886년에 홋카이도 전체 토지를 빼앗겼습니다. 1899년이 되어서야 아이누에게 토지를 나눠주지요. 차별적인 정책은 지속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이누 족에 대해서 낙후한 종족이고, 야만적인 문화라고 해서 그들의 전통과 생활풍습을 전면금지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아이누 족은 남은 전통문화만을 유지하는 소수 전통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누 출신들이 현재까지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차별들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온 것이며, 이제는 그들의 힘으로 해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완벽한 차별 구조로 정착되어 버렸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 족의 전통은 그것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보존시켜주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하였지만, 차별 문제의 개선에는 모른 척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누 족의 원래 근거지였던 지역의 토지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아이누 족의 영유권이 있는 일본 북방4영토의 경우 현재 러시아와 일본이 영토를 나누고 있습니다. 우르프섬과 에토로후(ウルップと択捉)는 러일전쟁 후에 양국에 의해 한반도의 38도 선처럼 분단 당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사이에는 북방영토 교섭의 이슈가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홋카이도 북쪽의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4개의 섬에 대해서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 하지만 이 논쟁과 교섭에 정작 당사지인 아이누 족은 배제되고 러시아와 일본 정부만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 아이누 족의 대표도 참여해야 합니다.

똑같은 경우가 작년 중일 간의 영토 분쟁지였던 센가쿠도(중국과 대만 그리고 오키나와 이시가키시의 중간에 위치한 섬. 2010년 중국의 어선이 일본의 순시선과 충돌하여 외교 문제로 대두함. 섬 주변의 천연가스가 발견된 이후 3국의 강한 영유권 주장으로 분쟁지역이 되고 있음)도 고유영토의 개념으로 보자면 류쿠 왕국의 영토였습니다. 류쿠 민을 배제하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요. 따라서 아이누 족과 오키나와 원주민의 문제해결은 이러한 근대 식민주의 청산의 입장을 확인하는 속에서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조+이 : 2008년에 홋카이도에서 G8회담을 개최했었는데, 홋카이도가 국제회의의 중심이 되면서 일본 정부의 원주민 문제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우에무라 : 홋카이도에서 G8회의가 있었지요. 그 회의에는 8개국 수뇌들, 옵저버까지 포함해서 12개국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했었구요. 홋카이도 개최로 인해 국제적으로 아이누 족 문제가 대두할 것을 염려했던지 일본 정부의 태도가 유연해졌습니다. 저희들은 일본 국회에 세계 원주민 권리조약(2007년 9월 13일 뉴욕 국제연합본부에서 채택됨. 세계 3억7000만 명의 선주민들의 인권침해 및 차별화, 주변화를 반대한 국제거인 룰)에 가입하도록 압박을 가했고, 결국 일본 국회에서 조약 비준이 이루어졌습니다.

2008년 7월 G8회담 직전에 정부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아이누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일본인들만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항의를 해서 아이누 족 관계자 1인이 참여했습니다. 정부가 아이누 족 출신의 위원회 멤버 참여에 반대한 논리가 당사자는 편견으로 결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권의 ABC도 모르는 발상이지요. 이처럼 그런 아주 저급한 인식의 수준에서 정부위원회가 출발했습니다.

세계원주민 권리조약을 비준하게 되면, 보고서도 만들어야 하고, 역사적인 문제로 에도 시대의 아이누 정책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받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 특히 토지 권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보고서에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강제 동화정책에 의해 아이누 문화가 무참히 파괴되었다는 점도 일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아이누 족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처리 방식은 식민지의 역사청산에 대한 배제적 태도도 전적으로 동일한 것 같습니다. 소수종족 문제나 역사청산 문제에 대해서, 개방적인 변화는 오히려 일본 국익에도 도움이 될 텐데, 왜 일본은 식민주의자 입장에서만 역사를 서술하려고 하는냐는 의문이 드네요. 일본 사회의 체질인가, 우익의 체질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우에무라 : 이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강력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일본은 식민주의를 할 때 서구의 합리주의를 배웠다고 생각했으며, 반면 아시아주의는 비합리주의라고 생각했지요. 천황제를 중핵으로 하는 근대권력 구조가 형성되었고, 특권층만이 권한을 가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전후 일본사회는 그러한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지 못했습니다. 온존된 기존의 권력구조 속에서 식민지시대의 인식체계가 재생산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오히려 형식적인 국가배상과 전후보상으로 인해 면죄부를 받은 전후의 일본 권력구조는 더욱 강력한 단일민족의 신화를 확대 재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원전에 대한 신화입니다. 안전성의 신화나 일본의 기술이 세계 최고의 기술이라는 환상은 일본 원전을 유지시키는 대중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지진은 상정 외였다'는 논리로 '간바레, 일본(힘내라, 일본)'이라는 논리 속에서 일본 신화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되는 신화를 전후 평화운동이 해체하지 못한 것이 현재 일본 사회 차별구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사청산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시민운동을 해야 한다'고 최근 자주 이야기합니다. 물론 일본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인디언 차별문제, 흑인의 차별문제 등도 그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각 시민단체가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조+이 : 일본의 인권운동을 대표해서 유엔 인권위원회 같은 국제기구에 참여해서 일본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압니다. 주로 어떤 쟁점을 제기하고 있는지요.

우에무라 : 주로 원주민 권리(Ainu, 오키나와인), 카스트(Buraku, 부락민)문제, 식민지배상(한국, 대만, 중국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 및 보상 문제)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인권보고서와는 다른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 대한 문제점을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유엔 인권위에 제출하는 운동입니다.

일본 판 카스트제도 부락민 차별과 소수자 운동

조+이 : 부락민 차별운동은 일본의 인권 및 사회운동에서는 중요한 축이지만, 한국사회에는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락민 차별문제와 인권운동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시지요.

우에무라 : 일본에서 부락민은 약 6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소수자 집단 중에서는 안정된 조직과 힘을 가진 집단이기도 합니다. 제가 소수자 운동에 참여했을 무렵, 전국의 많은 조직들이 대거 참여하여 대중적인 운동의 전개가 있었고, 운동의 방향과 성격에 대해서 저에게도 많은 발언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반(反)차별 국제운동(The International Movement Against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nd Racism(IMADR). 세계의 모든 차별과 인종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국제 NGO. 1988년 일본의 부락민 차별 철폐운동의 제안으로 전 국내외의 피차별 단체 및 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네트워크)이 있고, 관련 NGO단체들의 차별반대 네트워크 조직이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가 부락민 차별 철폐운동의 사무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일본위원회(反差別国際運動日本委員会, IMADR-JC)는 1990년 설립. http://www.imadr.org/japan).

부락민 문제라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일본의 카스트제도입니다. 직업이나 특정 지역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이지요. 예컨대 소나 돼지의 가죽을 취급하는 사람들, 죽은 소나 말을 처리하는 사람들, 가죽으로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 무사가 쓰는 말의 안장을 만들었던 사람들 등과 같이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차별받는 부락의 민중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소위 '백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고 이해하면 쉬울까요. 에도시대로 보자면 불교 교리 상 살생에 반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들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야의 사람들은 정결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구마모토 시이고 강 주변이어서 항상 범람했는데, 강은 왼쪽의 낮은 지역으로 범람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부락민이었지요. 대부분 차별받은 부락의 주민으로서 항상 사회의 빈곤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저희들도 식민지지역에서 귀국한 차별받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놀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정도니까요. 물론 결혼은 생각지도 못 했구요. 아이들의 성장기부터 사람을 차별하도록 교육시켰던 것입니다.

조+이 : 한국에 백정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은 근대화과정에서 최소한 법제도적으로는 없어지고 지금은 문화적으로 거의 완전히 소멸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일본의 경우는 좀 특수한 현상으로 보이네요. 근대로 이행하면서도 '사회문화적·관습적 차별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사회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에무라 : 메이지 유신기를 거치면서, 신분차별은 위로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권력이 지배구조를 안착화하기 위하여 차별을 구조화 하는 것이지요. 하층민이 저항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아이누는 규도인(旧土人)이라고 호칭하고 부락민은 신 평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개인의 호적에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개념 속에 이미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차별받는 사람들은 상호부조가 발전하여 집단을 형성하게 되지요. 그래서 특정 지역에 집중해서 살게 되지만, 공식적인 지역에 대한 법적 차별은 없지만. 지명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부락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부락민들이 살았던 지역의 전국 리스트를 만들어서, 기업에 파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입니다.

일본에서는 취업할 때 호적을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호적에 적혀 있는 지명을 보면, 바로 그 사람의 출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채용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일본의 기업 취업 시 제출하는 입사원서에는 호적을 기입하는 항목이 있고, 재일코리안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의 고향을 적기 때문에 이름은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한국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2008년 히타치 기업 등 일본 대기업에서 재일한국인의 내정 취소 파문이 일어나기도 함).

부락민 차별문제

부락은 원래 집락(集落)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집단의 하위에 별로도 피혁업종사자나 광대나 사형에 종사하는 사람들, 죽은 소나 말을 취급하는 사람들 등으로 구성된 천민(賤民)신분을 만들었다. 에도시대가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당시 불교의 종교적 영향으로 기피되고 있는 직업군들을 신분으로 고정화시켜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 그 계기이다. 이들은 대개 에다(穢多)라고 불렸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에다 등 신분제도 철폐를 통한 해방령을 선포하였지만, 일반 민중들 속에서는 오랜 전통에 의하여 이런 조치에 반대하여 민중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이들을 신 평민으로 불렀지만, 농민들은 평민으로 취급하는 것에 반대하여 에다로 그대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메이지 정부의 해방령에 의해 법적 지위의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지만,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은 더욱 심각해졌다. 현재까지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이런 영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개인적 수준에서의 교제, 결혼, 취업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거주지의 집단 취락에 대해서는 행정상 인프라 건설의 차별을 두는 등 사회적인 영향은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부락민 해방운동과 관련해서는 러시아혁명 직후인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린 시기, 인권침해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부방침에 항의하여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 사카모토 세이치로(阪本清一郎) 등이 중심이 되어 계급 해방을 주장하는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를 결성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정부의 탄압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편입되며 결국 1942년에 수평사 운동은 소멸하였다.

전후 부락민 차별철폐운동은 동포융화라는 뜻으로 동화(同和)문제로 불리기도 하였다. 1955년 부락해방동맹(현재 사민당 및 민주당 계열)을 결성하여 대중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보수층이 탈당하여 전국자유동화회(자민당계열), 일본 공산당 계열이 탈퇴하여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로 분열된 상태이다. 1969년 3 세력의 합의로 동화대책사업 특별조치법이 성립하여 10년 간 지원사업을 전개한 후 여러 차례 연장되어 처우개선에 힘썼지만, 동화대책위의 부패문제 여러 부작용도 겹치면서 2002년 공식적으로 동화사업은 종료되었다.

현재 부락민과 관련된 사람들은 약 6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조+이 : 그렇다면 차별을 상쇄해주고자 하는 역차별 정책(affirmitive action)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우에무라 : 장애인의 경우 역차별 정책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일코리언의 경우 한때 일종의 역차별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의 경제적 보완을 위해 빠징코 여업을 재일코리언들에게 우대해서 허가해준 예가 있습니다. 지금도 빠징코 업계에서 재일코리언들이 상당한 기반을 갖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락민의 경우는 오랫동안 동화사업이라는 것이 추진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조+이 : 한국의 경우 학생운동가 중에는 광주 및 전남지역 출신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차별을 받은 경험들이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사회운동이나 학생운동으로 이어질 것 같은데요. 일본의 사회운동가 중에는 부락민 출신 등 소수집단의 출신자들이 있는지요.

우에무라 : 물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차별받는 집단이 오히려 우익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정작 차별을 주도하는 것은 우익인데, 역설적이지요. 재일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우익집단도 있습니다. 폭력조직인 야마구치 조직(山口組, 효고 현 고베시에 거점을 둔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 주되게는 동화, 부락, 재일조선인들이 멤버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고 있다고 함)이 대표적이지요. 신나치 운동도 사회적 빈곤층과 차별받은 세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지요. 사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은 구조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익의 우산 속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고 강자의 입장에 서서 약자들을 차별하는 왜곡된 동지의식이 형성된다고 할까요.

여하튼 부락민의 정치의식이 높은지의 여부는 별도로 하더라도, 부락민 출신 중에 사회운동에 대중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락민 출신의 정치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자민당의 관방장관까지 올라간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1925년, 부락민 출신으로 교토도 부지사, 중의원 7선 의원, 자민당 간사장역임)이지요. 또한 이번에 내각 특명 재해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어 해임된 마쓰모토(松本龍, 1951년생, 민주당 소속 중의원 7선 의원. 부락해방동맹 부위원장 출신)씨도 부락민 출신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마쓰모토 지이치로(松本治一郎, 1887년1966년, 일본의 정치가, 부락해방운동의 초창기부터의 지도자, 부락해방운동의 아버지로 불림)라는 분으로 부락민운동의 유명한 리더였습니다.

아이누 족의 경우, 약 5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 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려면 약 20만 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이누 족은 자신들의 힘으로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제도가 있더라도 결국 일본인이 당선된다는 체념적 생각을 합니다. 한편 오키나와 인들의 경우, 인구가 많으므로, 현 내부에서 자신들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570명의 국회의원 중 고작해야 23명뿐이고, 이들의 힘만으로 오키나와 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일안보조약을 바꿀 수는 없는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강화되어 가는 단일민족의 신화

조+이 : 한국의 경우, 단일민족신화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주요한 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립물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한국에서도 단일민족의 신화는 대단히 강해서 외국인 및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국제 결혼한 이주여성들에 대한 동화주의적 정책이 강하게 존재합니다. 배제의 동력이자 동화주의가 국민적 상식이 고 주요 에토스가 되어가는 단계가 아닌가도 보입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는데요.

우에무라 : 한때는 한국사회도 일본과 동일한 단일민족신화의 토양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한국사회가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외국인의 지방참정권도 일본보다 빨리 인정했지 않습니까. 김대중 및 노무현 시대에는 국가인권위원회도 설치했구요.

이런 정책은 일본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와사키 시에는 정주외국인이 많아서 시장의 자문위원회가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주외국인들의 참정권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은 먼저 정주외국인들에 대한 인권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이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원주민의 권리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어떤 집념 같은 것이 느껴지네요.

우에무라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 시절 식민지 출신자들과 같은 마을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단일민족사회가 훌륭한 사회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일본 사회에는 여러 문화 및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요. 나와 다른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즐겁다는 것이 저희 할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준 교육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단일민족이라고 하는 주장은 100% 저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시절의 경험이 현재 운동의 집념과 지속성의 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이 :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이 국제인권 문제를 둘러싼 단체 간의 연대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보입니다. 1992년 비엔나 유엔 인권회의에 대비한 NGO Liaison Group이 발족하기도 했고, 1997년 87개 단체로 이주노동자 연대네트워크 발족, the Japan Citizen's Coalition for the UN International Decade of the World's Indigenous People 발족 등 다양한 연대 활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캠페인도 시작된 것 같은데요.

▲ 우에무라 히데키 <국내인권기관>
우에무라
: 저희는 독립성이 있는 국내 인권위원회를 만들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인권침해를 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여러 선전물을 통해 발표하고 있으며, 국민들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인권침해는 개발도상국의 다른 나라의 문제라는 식이지요.

NGO 단체들의 압력 및 유엔 인권위원회의 권고에 의해 일본 정부는 법무부 산하에 국가 인권위원회를 두자는 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NGO 단체들은 현재 정부산하 조직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국가 인권위원회 설립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저는 더 나아가서 다원성이 반영되는 위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아이누 족, 재일외국인 등 상이한 소수자 집단의 처지에 부응하는 새로운 원리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 앞서 제기한 것처럼 2005년 아소타로 당시 일본 외상이 일본은 단일민족국가(monoethnic nation-state)라고 말했던 것이 논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고이즈미 정부 때는 5번에 걸친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강력한 국가주의의 부활을 암시하는 듯한 현상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고이즈미 정권기부터 일본은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신자유주의의 추진은 오히려 소수집단의 인권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우에무라 : 고이즈미 정권의 정책기조는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많았습니다. 경쟁논리가 확대되었고, 차별이 구조화되어있는 사회 속에서 경쟁요소의 도입은 당연히 소수자에게 불리해지지요. 결국 공정한 경쟁에서 진 것은 당신의 능력의 문제이고 차별이 아니라는 식으로 정당화됩니다. 반인권적인 차별의 논리가 경쟁에서 졌다는 논리로 바뀌어가면서 차별이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특성상 기존에는 경쟁하지 않았던 분야까지 시장논리가 확대되어 가는 것이지요. 예컨대 교무소, 군대, 우체국의 민영화까지 진행되려고 하니까요.

한편, 이러한 민영화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등장하는 것이-진보적인 반(反)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아니라, 경쟁으로 해체된 사회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전통적인 국가논리가 강력하게 강조되는 현상입니다. 새로운 보수주의의 흐름이지요. 일본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조가 국가적 보수주의를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이 야스쿠니를 전략적으로 참배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일본 사회의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낡은 전통주의의 강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차별구조도 그대로 확대 재생산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마토 민족이 강력한 국가주의로 강화되다 보면 외국인 특별대우를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외국인에 대한 특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오고요. 외국인에 대한 특권도 주지 않았으면서도요. 심지어 아이누 지역에 대한 예산 배정의 필요성도 약화됐습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은 다원주의 및 다문화성을 배제하고, 낡은 전통적 국가주의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조+이 : 그런데 고이즈미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즉 미국식의 시장 주도적인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전통적인 국가주도 관료주의를 해체한다는 논리로 스스로 정당화하지 않았습니까?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국가주의가 결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긴장과 대립적 측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에무라 : 고이즈미 정권의 개혁에 의해 시민운동 진영은 속았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 관료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시민참여주의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고이즈미 내각은 시민참여는 늘리지 않으면서, 관료주의를 해체한다면서 소위 민영화를 들고 나온 것이지요. 민영화는 기업을 참여시켜 관료주의를 해체한다는 논리였습니다. 민영화가 개혁으로 보였기에 일부 좌익적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참여에 의한 관료주의, 권위주의의 해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오히려 기업과 관료의 유착, 즉 새로운 정경유착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소수자 인권운동의 현주소

조+이 :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배제(민주당은 고교수업료의 완전 무상화를 실시하여 일본 국공립 및 외국인학교에 대해서도 무상화를 적용. 하지만 조선학교는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교육내용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 등으로 무상화 대상 학교에서 제외하여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실시함. 교육기관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도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이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볼모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강함)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우에무라 : 인권은 정치와 분리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단위로 보더라도 그 경계선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삶을 보장한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원칙이지요. 출신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대우해야 하지요. 국제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들이나 조선인의 민족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나 동일하게 적령기 아이들의 교육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가 왜 고교 무상화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지 않고 차별하는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과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개개인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그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재일조선인 및 민족학교에 대한 차별은 역으로 북일 관계를 더 악화시킬 뿐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칸 수상은 퇴진 전날인 8월 29일, 문부성에게 조선학교 무상화 대상을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현재까지 커다란 진전은 없음).

인권문제로 다루는 것 자체가 역차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재일코리언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들인데, 인권 문제의 대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인권은 기본적으로 소수자를 지원하는 시점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방 참정권의 인정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같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일본인들의 인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조선인 인권단체도 존재합니다만 소수자에 대한 국제적 기준을 일본 사회의 재일코리언들에게 적용할 것인가는 일본의 NGO 단체들과 깊게 논의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조+이 : 일본의 난민 및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NGO 단체들의 의견과 시각은 어떻습니까.

우에무라 : 일본 정부는 아직껏 난민을 안 받겠다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난민 인정은 매년 수십 명에 불과합니다(2005년 기준 일본은 384명 신청에 46명 인정). OECD의 선진 나라들에서는 수천 명 수준인데도 말입니다. 최근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버마 난민을 일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2010년부터 일본은 타이에 탈출한 미얀마 난민을 매년 30명 정도 받아들이기로 결정). 약 50명 정도됩니다. 그런데 정주(定住)하기 위해 오는 일본으로 오는 난민은 적습니다. 대부분이 통과 난민이지요.

일본 정부는 버마(미얀마) 정부와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인도차이나 난민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는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동맹국이므로 책임을 져 달라는 식으로 요구했지요. 정작 인권의 이념에 기초한 난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조+이 : 소위 선진국 중에서 일본 사회처럼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배타성을 유지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네요.

우에무라 : 저도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 그룹에서 이런 철저한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얼마 전 유엔 개혁을 위한 엔지오 네트워크 회의가 있었습니다. 피스보트, 일본 자원봉사자 센터(JVC) 등 많은 NGO 단체들이 참여했습니다. 일본외무성과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3·11 지진사태 이후 국제연합 첫 회의에서, 일본 총리 및 외무장관이 중요한 입장표명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말하면 좋은가를 둘러싼 논의였습니다. 저희 NGO 측에서는 '많은 나라에서 지원을 받았다. 일치단결해서 힘을 내겠다. 그리고 더 나아가 3·11 이후 국제사회가 일본에 대해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런 측면에서 원전사고의 교훈을 살려서 핵시설 처리에 대한 예방원칙을 철저히 만들겠다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외무성은 '지원받았고, 고맙고 힘을 내겠다'까지만 동의하고, 정작 중요한 후자의 제안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일본은 외교정책이 없는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외무성의 북미 1과는 전체 조직에서 가장 인력이 많은 분야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기분을 파악하는 과에 불과합니다. 일본은 전후 독자적인 외교를 한 경험이 없지요. 미국의 말만 들으면, 일본의 이익에 부응한다는 식의 논리와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주류권력층은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국민도 유사한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정치가들은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3.11 이후의 문제를 여론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저는 국제회의장에서 인도 및 아프리카의 각 나라의 인권상황을 접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각국에서 인권정책을 바꾸려고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NGO 출신이지만, 일본의 인권에 대한 입장을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일본은 경제력에 부합하는 외교력, 정치력, 그리고 인권의식이 부재한 나라라고 봅니다. 3·11 이후에, 그리고 중동의 민주화 물결이 전개되고 있는 현 국면에서 일본은 외부의 변화의 움직임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 나라가 독재를 그만두고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들이기도 합니다.

▲ ⓒ조희연, 이영채

한국과 아시아의 인권운동에 대한 소견

조+이 : 외부의 시각에서, 한국의 인권운동이나 인권의식에 대한 조언이 있습니까?

우에무라 : 한국에는 인권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지인들이 있습니다. 지인들을 통해서 한국은 절차는 부족하지만,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국가폭력에 대해 저항했던 역사적 배경은 인권운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방문한 단체 중에는 여성단체인데 몇몇 사무국원들이 부모의 양성을 같이 쓰는 운동을 하더군요. 지금은 한국에서 상당히 보편화된 것으로 아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참여연대를 방문했을 때 사법 감시의 성공사례로 재판기록을 전시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권에 대한 위기의식을 국민 대다수가 공유했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굳이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고 하면, 국제회의 같은 데서 가진 느낌인데요. 일본과 한국은 국제회의장에서도 다원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아프리카와 같은 다문화 사회가 교차하는 공동체 속에서 정부 관계자부터 공존의 다원성 같은 것이 부족한 것 같은 태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조+이 : 그런 점에서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여전히 강렬하고요. 깜둥이라는 언어가 아직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상용되고 있고요. 한국 TV에 흑인 남성과 한국 여성의 결혼 커플이 나왔는데, 한국 생활에서 뭐가 가장 문제냐고 물으니까, 그 흑인 남성이 "쳐다보지 마세요, 깜둥이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에무라 : 예컨대 동아시아 인권 '레짐(regime)'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지역적 인권 룰이 없는 지역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민중들의 삶을 조직화하는 미래의 방식 속에는 국민 국가적 형태를 넘어서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국민국가라는 형태의 삶의 방식은 사실 단기간의 '예외적인' 형태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두 분의 생각과 동감입니다. 단지 동아시아는 국가 간의 격차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민주화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NGO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지반을 확대 강화해 하고,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키워드로 초국경적인 네트워크를 확대해가는 것이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 인권을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가르쳐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이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도 있고요. 아시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서구의 인권을 넘어서는 상호 진보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확대하려는 관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주변화 되고 있는 아시아의 사회경제적 권리 같은 것을 우리의 전통에서 찾아가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에무라 : 저도 동의합니다. 원주민의 인권 같은 것도 집단적 권리로서 추구되어야 하고요. 말씀하신 아시아적 차원의 문제는 아시아적 인권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베트남과 프랑스는 식민지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제국주의-식민지 관계를 사상하고 베트남의 인권을 서구적인 관점으로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먼저 이러한 지배관계가 청산되지 않았을 때 인권문제가 실현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아시아의 전통이나 문화에 기초한 아시아적 인권 개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이러한 인권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아시아의 전통이고 문화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자가 만든 문화만을 문화로 인정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권력자 층이 생성한 문화와 전통-이것은 인권을 억압하는 제도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만을 각자의 문화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권력자적 관점을 넘어선 아시아적 보편성이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고 국제사회에 발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이 : 우문일지 모르지만, 일본사회가 다문화 공생사회로 갈 가능성이 있을까요.

우에무라 : 일본은 추처럼 좌우로 움직이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금씩밖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만요. 짧은 시간에 평가하면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그러나 장시간으로 보면, 발전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영채 선생 같은 한국국적을 가진 학자가 이전에 인터뷰한 우츠미 아이코와 같은 평화학 대가의 후임으로 영입되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일본의 진보운동과 소통하면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일 간의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조+이 : 장시간 감사합니다.

▲ ⓒ조희연, 이영채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 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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