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프레시안과 인연이 되어, 이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1년하고도 2개월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칼럼의 일련 번호도 무려 ‘78’ 이란 숫자가 매겨졌다. 칼럼 당 200자 원고지로 28매 정도이니 따져보면 2천2백 매에 이른다.
그간 음양 오행을 가지고 많은 것들을 얘기해 왔지만, 정작 음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오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다소 철학적인 주제들이라, 처음부터 그런 얘기들을 하면, 아예 흥미를 잃어버릴까 싶어 일부러 피해왔었다. 그런데 이제 이 칼럼을 그간 읽어오신 독자들을 위해 어느 정도는 음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오행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독자들이 음양 오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글을 써왔기에 다루고는 싶어도 그러기가 어려운 주제들도 정말 많았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음양 오행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얻고 나면 독자들로서는 읽는 재미가 더 있을 것이며, 필자 역시 보다 자유롭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재미난 주제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드리고 싶은 얘기는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최소한 300회 정도는 써야 글감이 어느 정도 마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 새해도 맞이했으니, 이런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먼저 음양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음양이란 것이 처음 출발 단계에서는 해 길이의 길어짐과 짧아짐을 의미하던 말이었다고 여겨진다. 옛 책에 “음양은 소식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소식(消息)이란 말은 원 뜻이 줄어들다, 소멸한다는 의미의 소(消)자와 늘어나거나 자란다는 의미의 식(息)이 결합된 말이니, 늘어나고 줄어든다는 뜻이고, 바로 해 길이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소식은 나중에 변화라는 의미가 강조되면서 ‘news' 라는 말로 우리는 쓰고 있다(새 소식인즉 새 변화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좀 더 얘기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정보(情報)라는 어휘를 중국에서는 신식(信息)이라고 한다. 信이란 글자는 믿음이 주된 의미이지만, 사람(人)이 전하는 말(言)이니 소식 내지는 정보이기도 하다.
소식을 信으로 쓰는 용례는 요즘에는 별로 없지만, 전신전화국(電信電話局이라는 말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정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주로 사용했기에 우리 역시 쓰고 있지만, 信息이란 말은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을 중국에서는 ‘신식계통’(信息系統), 그들 발음으로는 ‘씬씨씨통’이라고 한다.
음양은 소식이고, 결국 해 길이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해의 길이가 변하는 이유는 태양을 도는 지구라는 행성이 축에서 23.5 도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해 길이의 변화가 나타나고, 계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낮과 밤 또한 지구의 자전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며, 이 또한 음양이다. 옛 사람들은 물론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해 길이는 동지(冬至)에 가서 가장 짧고, 그 이후 점점 길어지면서 하지(夏至)에 도달하면 다시 짧아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봄이고 여름이며, 가을이고 겨울이다. 이 같은 사 계절의 순환과 더불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이 우주적 박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만들어내는 리듬으로서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 내부의 리듬도 여기에 맞춰지고 조율된다.
낮과 밤, 계절의 변화! 이 순환과 박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내부 리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의 동력원(動力源)이다. 아울러서 달과 지구의 관계 또한 자연 현상과 생명체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태양은 양이고 달은 음인 것이다.
생명체는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자연 현상마저 태양과 달, 낮과 밤, 계절의 순환을 따른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지? 아주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다.
한낮의 구름은 더운 상승 기류로 인해 뭉개 구름을 만들어내지만, 해질녘의 구름은 낮게 드리운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원인이다. 흐린 날의 구름과 맑은 날의 구름은 그 모습이 다르다. 그리고 조수간만의 변화 또한 아시다시피 달이 원인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모든 자연 현상, 가령 여름에 내리던 비는 겨울이면 눈이 되어 내린다. 역시 계절이 만들어내는 순환의 한 양태일 뿐이다.
당연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이 순환과 리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맞추어 생활한다. 우리의 영혼과 인식 작용은 비교적 자연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봄에 우리의 마음은 약동하고, 가을에는 지난 일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봄에 만난 연인은 가을이면 헤어지기 쉬운 법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100 일 반지를 하는 이유도 그만큼 만남이 100 일 지속되기 어렵다는 얘기이고, 사랑의 감정 역시도 계절적 변화에 얼마나 민감한 지를 말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인류 문명이 사 계절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한 온대 지역에서 발전의 정도가 높았던 것은 결국 우연이 아니다. 이 또한 음양과 소식, 태양과 달이 만들어내는 순환의 영향을 받는다.
음양과 나중에 소개될 오행은 이처럼 자연의 순환,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울러서 우리 인간이 우주와 자연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방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를 대할 때, 자연과 우주는 그 스스로 자연이고 우주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들이 생긴 모습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방법을 통해 자연과 우주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봄날 들녘 언덕에 올라 맞은 편의 산을 바라보면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미 우리들은 약간의 기하학적인 지식이 있기에 산을 볼 때 삼각형 또는 원뿔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산은 삼각형이나 원뿔의 형태로 머리 속에서 모델링 된 후에야 우리는 산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산 그 자체가 아니라, 개념화되고 모형화된 산인 것이다. 물론 기하에 대한 지식이 지금과는 달랐던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산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처럼 모형화하는 방식의 차이가 바로 문화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필연적으로 은유를 낳게 된다. 성배(Holy Grail)라 하면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만, 우리들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절양류(折楊柳), 즉 버드나무 가지를 꺾는다 하면 이미 이 시대의 한국인들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멀어져 가는 님의 뒷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기 위해 눈을 가리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었던 동아시아의 문화공동체가 공유하던 은유였다.
문화란 결국 이 같은 은유의 덩어리들이고 복합체이기에, 그 문화가 계승되지 못하면 뒷사람에게 그 문화의 정수(essence)들은 수수께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최종 산물인 은유 복합체가 만들어지는 최초의 과정은 그러나 인류 보편적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물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방식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물을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령 우리 눈앞에 처음 보는 어떤 물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큰가 작은가(大小), 무거운 가 가벼운가(輕重), 긴가 짧은가(長短), 밝은 색인가 어두운 색인가(明暗) 등등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물체를 파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사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음양(陰陽)이며, 서구의 이원론(二元論)적 우주론의 바탕을 이루는 소박한 인식 과정이다. 이처럼 출발 과정은 동일하다. 사물을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파악해 들어가는 방식은 인류 보편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음양 사상은 서구의 이원론과는 나중에 가면 많이 달라진다. 이원론은 두 가지 요소가 고정 불변임을 가정하는 것이지만, 음양 사상은 두 가지 요소가 상대적인 것임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음양 사상, 또는 음양관(陰陽觀)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분류할 때, 남자를 양(陽)으로 보고 여자를 음(陰)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양이라는 것이지 남자 자체를 고정된 양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라는 것 또한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지, 절대적인 음양 구분은 아닌 것이다. 음양은 그 자체가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어른은 아이에 비해 양이고, 아이는 음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동물을 전제할 때, 양이며 동물은 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 전체는 식물에 비해 양이 되고 식물은 음이 되는 것이지, 동물 스스로를 양이라 할 순 없는 것이다.
음양관은 어디까지나 무엇에 비해, 즉 상대적인 관점에서 음양을 정하는 것이다. 요는 음양이 고정 불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을 추상적으로 음양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원론(Dualism)은 사물을 이루는 궁극적인 두 가지 요소를 결정짓는 것이다. 즉 세상은 선과 악, 낮과 밤, 불과 물 등등, 보는 이에 따라 두 가지 요소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음양관은 사물의 대극되는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임에 반해, 이원론은 두 가지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양관과 이원론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출발점은 같았으나, 그것의 상대성에 착안하는 음양관과 두 가지 요소가 고정적임을 강조하는 이원론은 나중에 가서 전혀 다른 인식 체계와 사상, 철학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관점과 인식의 차이가 나중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게 되는지는 다음 글에서 얘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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