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내 가족,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저녁 식탁에 오를 생선이 싱싱하고 탱탱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으로 침이 꿀떡 넘어가는 날들이었으면 좋겠고, 가족과 함께 연예가 중계를 보면서 누가 누구랑 결혼했대, 이혼했대, 왜 마약 먹고 난리야, 하며 어떤 이는 가볍기 짝이 없다고 흉볼 만한 그런 일상의 단순함에서 평화를 느끼고 싶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94년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평생 처음으로 ‘실감’하는 전쟁 위기이다.
북한과 미국의 대치 상태는 절벽으로 향하는 브레이크 없는 두 대의 전차 같다. 북한은 핵으로 자폭 위협을 하고, 미국은 그것 터져도 “내 집엔 불이 안 붙는다”는 태도처럼 보인다. 뉴욕타임스의 보수 논객 윌리엄 새파이어의 ‘주한 미군 철수 주장’은 단적인 예이다. 남한에서 미국인들을 철수시키고 나면 북한과의 전쟁 시 미국인 인명에 대한 부담이 훨씬 줄 것이라는 말이다.
미국인들은 자국민이라면 단 한 명의 목숨도 그들의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사수한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열 명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영웅적 행위’라고 여긴다. 그러나 미국에서 요즘 일고 있는 여론의 동향은 남한 국민들의 안전에 대한 배려가 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남한 사람들 생존의 위협 문제는 첫 번째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 같다.
9.11 사태는 정말 원망스럽다. 그 단일 사건이 미국인들을 얼마나 분노케 했고, 그 여파가 ‘전쟁 지도자’ 부시의 인기를 얼마가 강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는지 보노라면 잘못 떨어진 불똥 때문에 우리는 지금 대량 살상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2000년 대선때 간신히 백악관을 차지했던 부시의 인기는 꺼질 줄 모른다. 그의 대통령 깜냥을 걱정했던 이들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9.11 전에는 50%대에 그쳤던 그의 인기도는 9.11 이후 한때 90%까지 치솟았고 지금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민심의 흐름이다. 9.11 사태가 터졌던 날 오후, 종일 데스크를 떠나지 않았던 ABC 방송의 간판 앵커 피터 제닝스가 몹시 지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며 했던 말은 지금 미국에 흐르는 전쟁과 한반도, 북한, 남한에 대한 그들의 민심을 대변해 주는 한 실마리(clue)가 된다.
“그들(foreign country)은 왜 우리를 미워하죠? 세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처럼 공헌한 나라가 없는데 왜 우리를 미워하는 거죠? 도저히 알 수 없군요.”
많은 미국인들은 왜 세계 곳곳에서 반미 운동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미국이 싫다면서 왜 미국으로 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이 일등 국가이기 때문에 세계가 자기네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들에게 ‘반미 운동’은 상처이고 불쾌감이다. 그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북-미간에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대치 위기 상황 속에서 수많은 ‘피터 제닝스’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들의 ‘촛불 시위’이다.
뺨맞은 사람은 분명히 우리들이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에 관한 분노는 충분히 폭발시킬 만했다. 서울발 외신들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오랫동안 열심히 전해 주었다. 10만명 집회 현장은 감동적 헤드라인과 함께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인들은 평화로운 질서 속에서 여중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들은 SOFA 개정과 부시의 직접 사과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은 SOFA는 2년 전에 합의 봐서 고친 것이라 생각하고,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사과했다고 여긴다.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측이 한 사건의 해결책을 놓고 보이는 입장은 그야말로 “문화의 차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들이 미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미국인들도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는 우리들의 요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건 ‘우월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 사고 구조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적 논리인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한국인들의 정서 속에 묻혀 있는 미국으로부터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에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어떻게 더 발전된 방향으로 승화시키느냐이다.
2003년이 내일인데, 이 해에 우리 국민이 이룬 업적은 ‘승리’ 그 자체이다. 월드컵이 그렇고 대통령 선거가 그렇다. 효순이-미선이를 위한 촛불 시위도 장기적으로 한-미 관계를 대등하게 키워 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한 해에 이뤄진 이 세 가지 ‘승리’로 우리가 얻은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닐까? 우리 국민이 주체가 되어 정치권을 견인해 내고, 언론계를 견인해 내고, 신사고의 역동성을 증명했으며, 무엇보다 전 세계에 한국인들이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그러니 이 여세를 몰아 2003년 다시 한번 세계 평화를 위한 한국인들의 의지를 천명하는 데에 힘써보면 어떨까.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내년 1,2월에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그야말로 기름 때문에 이라크 전을 일으키는지, 테러 응징을 위한 정의의 사도로 그러는지 따지는 것은 이 시점에서 차라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평화와 대화보다는 일방주의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시’ 스타일 때문에 우리들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
2002년 우리들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10만, 1백만이 모여도 사고 하나 없이 평화롭게 집회를 치를 수 있는 질서 의식과 단결력이었다. 지구본을 돌리면 우리는 동과 서가 만나는 중심지에 놓여 있는 것 같다.‘동방의 불빛’이 환하게 타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효순이-미선이 때문에 들기 시작한 촛불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우리들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것은 아닐까?
그 촛불을 들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한반도 평화를 요구해보면 어떨까?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버클리 젊은 학생들이 결국 반전 무드를 이끌어 내었듯이, 우리들이 드는 촛불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촉구하는 것이어서 결국 그것이 세계 여론을 주도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위치를 세계 중심 무대로 끌어내어 놓는 일도 없지 않을까?
북핵 위기를 막는 데에는 친미, 반미가 필요치 않다. 우리들 모두의 생존이 걸려 있다. 부시를 지지하던 미국의 퍼터 제닝스들은 남한에서 불어오는 ‘반미’가 아닌, 반전 평화 촛불의 밝기에 누구보다 동조하는 세력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시의 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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