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계기에서 음양 오행과 연을 맺은 이래 오늘날까지 햇수로 30년째가 된다. 참 대단한 세월이다 싶지만, 돌이켜보면 찰나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었을 뿐이다.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는 부귀와 권력에 대한 명리학적인 함의(含意)를 간단하게나마 얘기해보고자 한다.
부귀와 권력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데에 근본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싶은 욕구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존엄성(dignity)을 확인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와 귀, 그리고 권(權)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운명은 참으로 드물다. 명리학적 견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모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부(富에 대해 얘기하겠다.
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의 일용할 양식(糧食)이 아니다. 부란 스탁(stock)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쌓아놓은 것을 말한다. 자연 속의 동물들은 하루 먹을 양식 이상의 것을 축적하기가 어렵고 축적하는 법도 잘 모른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그토록 탐심이 많은 것은 축적하는 지혜를 터득한 이후부터였다.
원시인들에게 있어 축적은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서 배에 지방이 끼도록 하는 생리적인 저장기술 밖에는 몰랐다. 그러나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가축을 길들이면서 인간은 축적이라는 개념을 지니게 되었다. 스탁은 사회를 만들어내었고, 사회는 권력을 만들었다.
흔히들 ‘먹고 살면 되었지 않느냐’는 말도 있건만 돈 많은 사람이 더 벌고자 애쓰는 이유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란 곳은 언제나 자신보다 더 많이 쌓아놓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탐심(貪心)은 끝이 없는 것이다.
부는 스탁(stock)이어서 내일 소득이 없어도 굶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뜻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내일은커녕 평생 놀고먹어도 별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많은 스탁을 쌓아놓고도 더 벌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는 부가 사회적 가치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화폐가 생겨나고 화폐의 추상화가 고도로 진전된 오늘날에 와서 부나 스탁, 또는 재산이라 하면 곧 돈을 의미하게 되었다. 언젠가 일본인들의 총 저축이 년간 GDP를 능가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필자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저축이 GDP를 넘었다면 그 국민 전체가 일년간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일년간 먹고 살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인류 역사상 한 집단이 그처럼 엄청난 스탁을 쌓았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이로웠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시 거지가 있고 빚에 몰려 자살하는 이도 있는 나라이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권력과 분배 구조의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탄식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년씩이나 놀고먹을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굶주리고 자살하는 이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는 2년 아니 3년 이상 놀고먹을 수 있는 스탁을 쌓아놓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 한가지 경이로운 것은 일본의 그처럼 엄청난 스탁은 화폐평가액이어서 식량수출국들이 식량을 수출하지 않으면 밥도 고기도 먹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화폐의 본질에 대한 대단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명리학적 견지에서 부자가 되려면 본인의 기운이 충실하고 외연적 확장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부란 물질적 풍요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아의 외연적 확장을 통해 부를 쌓은 사람들도 부족한 점을 느낀다. 쉽게 말해서 살아감에 있어 돈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정신적 풍요도 필요한 법이다. 이 지점이 바로 귀(貴)가 대두되는 지점이다.
귀란 정신적 만족을 의미한다. 성속(聖俗)의 관점에서 부는 속에 해당되며, 귀(貴)란 성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양자는 반대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귀(貴)라 함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위치나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 귀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다음으로 사회 속에서 홀대나 멸시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그 사람의 개체로서의 존엄성(dignity)을 인정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돈 없으면 홀대받기 쉬운 것이 오늘의 세상이지만, 그것은 부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부한 자의 부를 일부나마 얻어보려는 마음의 발로일 뿐, 부한 자가 귀한 자는 아닌 것이다. 돈이 제아무리 많아도 베풀 수 없는 자는 귀한 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부한 자가 귀해지려면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자신의 스탁 일부를 베품으로써 귀를 사들이는 방식이다. 서구의 부자들이 자선 바자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이다.
그러나 자선 바자회를 연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넉넉함을 과시하는 면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베푸는 마음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귀인 것이다. 나눌 줄 모르면 아무리 부해도 귀하지는 않다. 아울러 돈 몇 푼이면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장삿속에 지나지 않으며 그 또한 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나아가서 그런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물신적 풍토라고 비판하는 속됨이요 귀의 반대인 천(賤)한 것이다.
귀의 원 뜻은 비싸다는 것이고, 천의 원 뜻은 싸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중국어에서는 부와 귀가 여전히 이런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다는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람을 싸게 본다는 것이니 그 마음 자체가 천한 것이 된다. 귀한 사람은 남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나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고 당신도 살아갈 존립 근거가 있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공존공생(共存共生)의 정신이다.
예를 들면, 귀한 사람은 자신에게 봉사한 사람에게 팁을 줄 때,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상대의 봉사를 평가하면서 팁을 건네는 사람이다. 반대로 천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팁을 건넨다.
명리학 상으로 부는 물질적 풍요이고 귀는 종교와 학문, 세상으로부터의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적인 성격을 지닌다. 공부하는 시절에 연애에 몰두하면, 공부가 어렵고 연애하는 시절에 공부하면 연인을 빼앗기는 법이다. 동시에 귀는 성(聖)이고 부는 속(俗)의 세계에 속한다. 성과 속, 줄여서 성속(聖俗)은 인간 세계의 두 가지 필수 요소이며, 정신과 물질의 영원한 균형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종교의 사제나 승려는 학자와 같은 부류로서 귀를 의미한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과거시험을 통해 귀의 길로 들어섰던 것은 따라서 동아시아 세계만의 전통은 결코 아니다. 서구 역시 로마가톨릭적인 전통 속에서 학자와 승려는 언제나 같은 계급이었고 줄여 말하면 귀한 신분이었다.
명리학 상 귀한 자의 요건은 자아가 너무 강하지 않아서 교만하지 않고, 학문과 종교를 수용하는 자이다. 이런 유형에는 학자라든가 종교인, 조직의 틀 안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나 공직자 등이 해당된다. 인내력이 강하며 자기 주장이 지나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직자나 학자, 종교인이 돈을 밝히면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법이다. 앞서 말했듯이 부란 일용할 양식이 아니어서 부를 탐하지 않는다고 해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며, 다만 몇 년 뒤까지 먹을 것을 쌓아놓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와 귀는 본질상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이제 권(權)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명리학적으로 권력을 쥐는 이는 자아가 강하면서도 사회적 책임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주관과 소신이 확고한 인물이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인데 왜냐면 권력의 본질은 배분(配分) 기능에 있기 때문이다.
제반 사회적 가치들을 공평하게 나눌 줄 아는 자가 그래서 훌륭한 권력자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재상(宰相)이란 울타리(특정 조직체나 집단)안에서 먹을 것을 나누는 칼을 쥔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떡을 나누는 자를 재상이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은 공평하게 나누어야 할 책임이 당연히 수반된다.
쟁취하는 자는 부를 쌓지만, 그것만으로 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쌓은 부를 함께 노력한 자들에게 공로에 따라 합리적으로 나눌 수 있을 때 권력의 정당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실패한 권력자는 이 나눔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에 곧잘 비교하곤 한다.
권력자는 귀한 자, 즉 공부하고 학식이 있는 자를 불러 측근에 두고 보호해 주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공업(功業)을 길게 가져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게 한다. 그 방법적 핵심은 잘 나눔에 있다. 그리고 그 배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분이 권력의 배분이다. 이를 현대적으로는 권한의 하부 이양이라 하지만, 사실 대단히 어려운 기술이고 전략적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귀한 자는 권력가의 주변에 있기 쉽고 그에 따라 권력도 일부 위임받아 누리게 된다. 이런 자를 권귀(權貴)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권귀의 존재이다. 대의 민주 사회에서는 대통령도 권귀에 속한다. 다만 선거라는 민주적 투쟁 방법을 통해 한시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때문에 일반 공직자와는 다른 법이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부와 귀, 권력까지 모조리 영속적으로 누리고자 기도할 때는 가장 지독한 비린내가 나는 법이다.
서구인들은 민주주의의 본산지답게 공직을 public service 라고 하지만, 왕조나 황제 치하에서 살던 동아시아 지역은 여전히 공직이 봉사보다는 사회적 획득물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권귀의 핵심 기능을 공평한 나눔의 자리로서 보느냐, 투쟁의 획득물로 인식하느냐, 바로 이 점이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결정짓는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부 중에 가장 좋은 부가 자부(自富)이며, 귀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자귀(自貴)이다. 자부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부자일 수 있는 마음이며, 또 자귀란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 자신을 소중히 가꾸며 남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마찬가지로 권력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자권(自權)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고 독립독보(獨立獨步)할 수 있는 주관적 정신을 말한다.
<'김태규 명리학' 1-46회가 최근 책으로 묶여 '음양오행으로 본 세상사'란 이름으로 출간됐습니다(동학사 펴냄).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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