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망한 재벌'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망한 재벌'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

최순영 전회장 "정치탄압 때문이었다" 주장하나...

한국 맥킨지사의 도미닉 바튼 대표는 최근 동료 두명과 공동집필한 <위험한 시장(Dangerous Markets)>이라는 영문서에서 위기대처 능력과 관련해 CEO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바튼이 말하는 세 가지 CEO**

첫번째 CEO는, 위기 도래 여부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망할 CEO다. 이런 CEO는 위기감지 능력이 전무하다. 자신이 서있는 땅이 통채로 꺼지고 있는 데도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망한 후에도 왜 망했는지를 모른다. '남탓'만 할뿐이다.

두번째 CEO는, 위기가 닥혔을 때 '시간끌기'에 급급해하는 CEO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는 능력은 있으나,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읽고 근원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능력은 없는 경우다. 이런 CEO는 근원적 수술 대신 각종 편법을 동원한 대증요법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기업을 망가트린다.

세번째 CEO는, 위기를 경쟁자 추월의 계기로 반전시킬 줄 아는 CEO다. 위기는 자신만 겪는 게 아니다. 경쟁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상대방보다 탁월하게 돌파할 것인가이다. 이러기 위해선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읽고 과감한 수술을 단행, 체질을 싹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이같은 철저한 자기개혁과, 직원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Great Story)'를 할 줄 아는 CEO야말로 말 그대로 CEO라 할 수 있다는 게 바튼 대표의 주장이다.

***"Right Man at Right Time"**

맥킨지사는 IMF사태 발발후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컨설팅그룹이다.

국제금융계에서는 "INMF와 맥킨지는 바늘과 실 사이"라고 말한다. 외환.금융위기를 겪으면서 IMF구제금융을 받은 50여개 나라에서 거의 빠짐없이 맥킨지가 국가시스템 및 금융.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맡아 주도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IMF사태 발발직후 맥킨지는 우리 정부의 공식 구조조정 컨설팅을 맡았다. 만만치 않은 액수의 컨설팅 용역비는 IBRD(세계은행) 지원금에서 지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맥킨지는 IMF사태 초기, 구체적으로는 DJ정부 초기의 구조조정 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 예로 정부가 98년 6월말에 단행된 5개 퇴출은행의 살생부를 만드는 데에도 맥킨지 컨설팅 자료가 결정적 작용을 했다.

맥킨지는 이같은 정부 컨설팅외에 민간 금융.기업의 개별 컨설팅도 맡아 민간 구조조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주택은행(현재의 국민은행), 두산그룹, 삼성생명 등 내로라 하는 간판기업의 구조조정에 참여했다. IMF사태 전에는 LG그룹, 연세대학교 등의 컨설팅도 맡았었다.

맥킨지는 이같은 과정에 한국 경제계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이같은 작업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이가 다름아닌 도미닉 바튼 한국 맥킨지 대표이다. 때문에 <위험한 시장>이라는 그의 저서는 내용의 상당 부분을 한국에 대해 할애하고 있으며, 앞서 말한 '위기상황 하의 세 가지 유형의 CEO' 역시 IMF사태를 겪으면서 각기 다른 대응양식을 보였던 한국 CEO들에게서 찾은 느낌이다.

한 예로 바튼은 DJ정부 초기의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Right Man at Right Time(꼭 필요한 시기에 해야 할 일을 적확하게 한 이)"이라는 최고의 표현으로 격찬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한 최고의 국가 CEO'라는 찬사다.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박용성,박용오 두산그룹 오너 등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바튼은 하지만 "위기는 앞으로 더욱 빈번하게, 더욱 거대한 피해를 몰고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생한 금융위기로 한국 등 해당국가들은 수조달러의 천문학적 피해를 입었지만 앞으로 위기는 더욱 빈발하고 피해규모도 커질 터이니, 지금의 자그마한 성공에 안주하지 말라"는 경고성 조언이다. 간단히 흘려보낼 얘기가 아니다.

***"사업 30여년간 가장 큰 실수는 DJ에게 정치자금 안준 것"**

정권말기를 맞아 IMF사태때 망한 오너들이 여기저기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기업경영을 잘못 해서 망한 게 아니라, '정치탄압'으로 망했다는 항변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빼앗긴 수조원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는 공언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최근 주장이다. 월간 신동아는 최신호에 "DJ에게 대선자금 안 줘 63빌딩 빼앗겼다"는 제목의 최순영 전회장 인터뷰를 실었다.

"완전히 초법적으로 이뤄진 거예요. 그 배후에는 정치자금 문제가 있고 옷로비사건도 관련돼 있어요. 나를 구속하기 위해 언론과 시민단체를 동원해 외화를 밀반출했느니 해외에 별장을 사 놓았느니 비행기를 사놓았느니 하면서 매도했어요. 총수를 구속한 지 한달만에 국가가 강제로 기업을 점령한 건 대한민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에요.

가장 큰 이유는 1997년 대선때 DJ에게 대선자금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건의 대전제입니다. 내가 30여년동안 사업하면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한 게 그때예요. 그걸 안 줬기 때문에 이 정권이 출범한 후 30대 기업중 대표적으로 얻어맞은 거예요. 대략 알겠지만 그때 대선자금 제대로 안 줘 괘씸죄로 걸린 기업이 신동아그룹과 모 항공사, K그룹, D증권이에요. 호남의 대표적 기업인 K그룹과 D정권은 나중에 잘 타협해 살아났지만, 나와 모 항공사 회장은 구속돼 혼이 났죠.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최순영 전회장의 이같은 주장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97년 대선때 이회창 후보에게만 대선자금을 주고 DJ에게는 자금을 주지않아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동안 무수히 언더그라운드의 정보지 등에 실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매체에 '활자화'되기에 이르렀다. 대선을 한달도 채 안 남겨둔 권력말기이기에 가능한 일종의 '대선 현상'이다.

최 전회장은 항소심에서 2천2백여억원이 나왔으나 아직 미납상태인 추징금을 어떻게 내겠냐는 질문에 대해 "회사 찾으면 다 낼 수 있어요. 몇 조원 찾는데 몇 천억원이 문제겠습니까"라고 호언했다.

***최순영 전회장이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이유**

최순영 전회장의 주장의 옳고그름은 앞으로 분명히 규명돼야 할 과제중 하나다. 그의 주장은 '정경유착'이 기업생존의 주요변수였던 시대의 일면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DJ정권초기때 국민들은 최대 부실기업이던 대우그룹이 도리어 승승장구하던 모습을 지켜봐야 했었다. 최규선은 훗날 녹음테이프에서 "DJ가 나를 많이 도와준 대우를 잘 봐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순영 전회장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앞서 바튼 대표가 분류한 '세 유형의 CEO' 가운데 첫번째 유형의 CEO, 즉 '위기 도래 여부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망할 CEO'가 아닌가라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그런 대표적 예가 최순영의 회장직 사퇴 및 구속사유가 됐던 대한생명 부실과 관련한 그의 해명이다. 금감위는 99년 6월말 현재 대한생명의 부채가 자산을 2조6천7백억원 초과한 실사자료를 근거로, 최순영 당시 회장의 보유주식을 소각한 뒤 3조5천5백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대한생명을 국영화시켰고 신동아그룹을 해체했다. 이에 대한 최순영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순전히 가설로 계산했어요. 대한생명이 일시에 망할 경우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모든 보험가입자한테 돈을 내줄 수 있는지 없는지 가정한 겁니다. 따져보니 내줄 돈이 모자란단 말이예요. 그래서 부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기업도 살아남지 못해요. 삼성도 못 살아남아요. 부채가 있는 기업이라면 다 그렇죠. 딱 날짜를 잡아 일시에 은행빚을 다 갚으라면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런 이론으로 대한생명을 국유화한 거예요. 당시 대한생명이 신동아그룹 계열사에 빌려준 돈을 다 떼일 것으로 보고 부실로 잡은 거예요."

"또하나, 1997년인가 1998년인가부터 시가평가제라는 걸 도입했어요. 대한생명 같은 보험회사들은 증권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채권이야 금리가 고정돼 있으니 상관없지만 주식은 시세에 따라 가격변동이 심하지요. 시가평가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연말 결산때 매입가격 그대로 장부에 적었어요. 그런데 시가평가제가 되면서 1000원에 산 주식이 500원으로 떨어지면 500원 적자 낸 것으로 기재하게 된 거예요.

IMF이후 정부가 상당수 은행을 부실금융기관이라며 퇴출시켰잖아요. 당연히 은행 주식이 폭락했죠. 당시 대한생명이 경기 조흥 제일 서울 등 4개 은행의 대주주였어요. 구조조정 과정에 그 주식들이 저평가됐습니다. 그걸 부실로 잡은 거예요. 그건 국가에서 책임질 일이에요. 은행 주식 갖고 있던 게 죄입니까."

***최순영 주장의 허구성**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대한생명의 부실이 과다하게 1조4천5백억원 뻥튀기돼 강제로 대한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경제문외한이 보면 그의 주장은 말이 되는 것도 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경제를 아는 이들이 보면 어이없는 주장의 연속이다.

최 전회장이 맨처음 말한 "보험가입자한테 돈을 내줄 수 있는지 없는지"라는 항목은 경제용어로 '지불준비금'을 가리킨다. 지불준비금은 IMF사태 발발 전에부터 법규에 명시돼 있던 의무조항이다. 보험가입자들이 돈을 떼이는 일이 없도록 보험가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장치다.

최 전회장은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기업도 살아남지 못해요. 삼성도 못 살아남아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 살아남은 기업들 대다수는 이 의무조항을 충족시켰다. 부족하면 알짜기업을 내다팔아서라도 충족시켰다. 또 최 전회장이 못 살아남는다는 삼성생명은 지불준비금을 모두 충족시킨 것은 물론, 수조원의 사내잉여금까지 비축해놓고 있다.

두번째, '시가평가제'에 관한 주장은 더욱 어이없다. 시가평가제는 IMF사태 직후인 98년 도입됐다.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기업의 실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에는 보유주식의 시가가 아닌 발행가로 자산을 평가했었다. 액면가 5천원짜리 주식이 5백원으로 폭락했어도 보유주식을 5천원으로 평가하다 보니, 그 놈의 회사가 얼마나 부실덩어리인지를 장부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이에 금감위는 재계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이 제도를 도입, 기업의 투명성을 크게 개선시킨 것이다.

옆나라 일본은 아직도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로 시가평가제를 도입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 금융 및 기업의 부실이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다 보니 제대로 구조조정을 할 수 없고 투자가들도 투자를 기피하다 보니, "일본금융이 한국금융에게 추월 당했다"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른 것이다.

최순영 전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실은행 주식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가 수천억원을 날린 잘못도 정부탓으로 돌리고 있다. 정부가 멀쩡한 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몰아 퇴출시킨 결과 대한생명이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대한생명이 대주주 자격으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은행은 경기, 조흥, 제일, 서울은행 등 네곳이다. 이 가운데 세 군데가 자본까지 완전잠식당해 파산하면서 25조원대의 천문학적 국민혈세를 쏟아부어 정리해야 했고, 조흥은행의 경우 3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어렵게 회생시켰다.

이런 마당에 나온 최순영 전회장의 "그건 국가에서 책임질 일이에요. 은행 주식 갖고 있던 게 죄입니까"라는 항변은 왜 국내 제2의 거대생보사였던 대한생명이 맥없이 쓰러져야 했던가를 분명히 알 게 한다.

최순영 전회장이야말로 앞서 바튼 대표가 말한 '위기 도래 여부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망할 CEO'였던 것이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은 자기체질을 튼튼히 하는 일"**

최순영 전회장의 인터뷰를 봤다는 삼성그룹 구조본의 한 임원은 이렇게 소감을 피력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에 있었던 게 솔직한 현실이다. 너무 가까이 가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는 관계다. 어찌 보면 이같은 거리를 얼마나 잘 유지하는가 여부가 경영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기업이 반드시 또하나 갖춰야 하는 게 '자기체질을 튼튼히 하는 일'이다. 어떤 정치외풍이 불어오더라도 기업 자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평소 경영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최순영씨는 두 가지 모두 실패한 경영자가 아니었나 싶다. 억울함이야 왜 없겠냐만은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치탄압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연말 대선이 한달도 채 안 남았다. 대선 결과만 나오면 사실상 정권이 교체된다. 그러면 최순영 전회장과 비슷한 주장을 펴는 이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올 것이다. 개중에는 정말 억울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억울함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옥석은 분명히 가려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 가운데에는 경영자가 갖춰야 할 ABC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도 엄청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옥석을 구분 못하면 경제는 엄청난 비생산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차기정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