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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청산은 글로벌 시대의 일본을 성찰하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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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청산은 글로벌 시대의 일본을 성찰하는 거울"

[수정일본사회 탐방]<6> 우쓰미 아이코, '조선인 BC급 전범' 연구자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쓰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여섯번째로 일본 전후보상운동의 대표적인 역사사회학자 우쓰미 아이코 와세대대학교 겸임교수를 만났다.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편집자>


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 うつみ あいこ)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의 점령기를 보고 자란 그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입학, 자이니치(재일동포) 등 소수자 문제를 학문의 주제로 삼았다. 60년대 중반 일본 사회운동진영이 처음으로 설립한 '조선문제연구소'에서 가지무라히데키, 사토가츠미 등 조선연구 1세대들과 함께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유학하던 중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희생자 중에 BC급 조선인 전범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 이 문제를 40여 년에 걸쳐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왜 조선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인 전범으로 사형을 받았는가. 조선인 전범은 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희생당했는가. 일본 정부는 왜 이들 조선인 전범들의 문제를 은폐하고 보상을 해오지 않고 있는가. 40여 년에 걸친 우쓰미 선생의 연구는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규명하고, 일본정부의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후 처리의 이중성을 폭로하면서 일본의 전후보상운동의 한 축을 실천적으로 지탱해왔다.

1991년 다타 요우코 반권력 인권상(多田謡子反権力人権賞)을 수상하였고, 일본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의 창구역할을 해 온 시민단체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PARC) 대표, 일본평화학회회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부터 한국정부에 의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진상규명회의 활동을 지원하는 일본 측 네트워크의 공동대표, 유골반환 공동대표 등을 겸임하고 있다. 게이센 여자대학교를 정년퇴임 하고 현재는 와세다대학교 객원교수로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후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戦後補償から考える日本とアジア)>(김경남 역, 논형출판),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朝鮮人BC級戦犯の記録)>(이호경 역, 동아시아출판사),
<김은 왜 재판을 받았는가(キムはなぜ裁かれたのか)>(아사히 신문 출판부) 등이 있다.


조+이 : 먼저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당시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지요.

우쓰미 : 1965년에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학원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책이었지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동경에서 출생해서 생활해오던 저로서도 그런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발밑의 역사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 위해 와세다대학교 사회학 연구과에 진학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 대해 의문이 있었고, 특히 일본 근현대사에서 식민지지배를 했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은 전공투(1960년 말 일본사회 및 학원의 권위주의 해체를 주장한 학생운동 조직 '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에 의한 투쟁의 시대였고, 학원의 학벌주의와 권위주의를 해체하자는 분위기는 박사과정에 있어도 자리가 없었기에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남편이 이슬람사회의 개발 문제를 연구하고 싶다며 인도네시아 파견유학생 시험을 응시해서 장학금을 얻었습니다.

나 자신은 한국에 유학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는데다 지인이 한국에서 일본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체포되는 일이 벌어져 한국행을 포기했습니다. 결국 남편과 함께 인도네시아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조선관련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 우쓰미 아이코 ⓒ조희연 이영채

조+이 : 우파가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은폐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면이 있는데, 좌파진영도 무관심했다는 것이 흥미롭군요. 6070년대 공산당 및 사회당으로 대변되는 구좌파와 신좌파들의 아시아와 식민지 지배의 인식은 어떤 경향이 있었습니까?

우쓰미 : 그 당시의 좌파의 아시아 인식은 나중에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다는 무토 이치요우 선생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것입니다. 60년대 안보투쟁 당시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 인도네시아 유학을 마치고 대학으로 다시 돌아왔지요. 70년대 초반 전공투 시기에 저는 대학원생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경우, 일본에서는 한미일군사동맹의 가능성에 대한 반대의 측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좌파운동도 한일회담에 대해서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했습니다(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일본 사회운동이 내건 슬로건 중에 '朴にあげるなら僕にくれ(박에게 주려거든 나에게 주라)'라는 표현이 있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일본 정부지원 반대의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산의식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지적). 또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요.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 속에서도 식민지문제, 즉 식민지 지배 및 식민지 민중의 고통과 책임문제들에 대한 인식은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연구소가 테라오 고로(寺尾五郎. 1921년1999년, 일본공산당 간부. <38度線の北>(1959)라는 책을 써 북한의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하여 재일조선인의 북한귀국운동에 영향을 줌)씨를 중심으로 한 '일본조선연구소'(1961년에 설립하여 잡지 <조선연구>편찬, 초기에는 좌파성향의 연구 단체였으나 분열 후 우파성향의 연구단체로 전락, 84년 '현대코리아연구소'로 개명)였습니다. 그는 일본공산당 소속의 활동가였습니다. 이 단체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 조선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왜 일본에는 책임의식이 없는가

조+이 : 전후 처리 문제는 일본정부가 아시아 민중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후 60여 년이 지났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 체결된 대일평화 조약. 일본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독립을 보장한 조약. 미국을 포함해 연합국은 청구권을 포기하였고, 중국 및 한반도의 양 정권은 서명에 초청되지 않음. 독도 및 센각토 등 일본 주변의 영토문제에 대한 해석문제와 재일외국인의 국적박탈 등 전후외교문제의 발단이 됨) 등 연합국의 전쟁 처리방식 자체에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일본을 민주기지에서 반공기지의 보루로 육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쓰미 : 패전 직후,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과의 연대하에 일본 공산당의 전후 초기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1945년 10월 10일 오사카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일본공산당 간부들을 맞이한 것은 재일조선인들. 전후 제1차 일본공산당확대위원회가 동일 오사카의 재일본조선인연맹 사무실에서 열림. 조련은 식민지배 청산을 표명한 일본공산당을 지지함).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재일조선인 운동이 총련으로의 노선 전환이 생기고, 또한 일본공산당도 민족운동에 대한 방침 전환을 표명하면서 식민지 청산의 과제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습니다(재일조선인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일본공산당의 지도노선에서 이탈하여 조선노동당의 직접 지도를 받는 총련으로 분리됨. 일본공산당은 중국과 소련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민족운동에 대한 노선의 수정을 통해 총련의 독립을 인정.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이 공식적으로 소멸됨). 전후 일본의 좌파운동 속에서 아시아의 식민지지배 문제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진 것은 이 시기 재일조선인 운동과 일본공산당 운동의 분열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일본사회가 침략전쟁의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먼저 동경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포츠담선언 10조 및 46년 1월 일본의 항복문서에 근거하여 46년 4월 26일 전범에 대한 재판을 개시하여, 48년 11월 12일 종료. 평화에 관한 죄. 통상의 전쟁범죄 및 인도적 죄의 명목으로 28명 기소, 도죠 히데키 수상 등 전쟁수행의 명령책임자인 A급 전범 7명 사형, 16명 종신형 등을 받음)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패전 이후 동경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연합국은 전범들의 책임문제에 대해서 승전국에 관심이 있는 2차 대전 중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부분만 기소를 했으며, 아시아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전쟁범죄는 일절 묻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인데, 연합국인 네덜란드의 위안부 문제는 재판에서 다루어졌지만, 조선인 및 대만인의 위안부 문제는 추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연합군이 전쟁재판을 진행할 때에,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 지배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인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 측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구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하여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일본사회가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을 하는 계기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조약의 성립 과정에는 한국전쟁의 발발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을 제시해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엄격한 배상을 받고자 했던 미국 및 연합국의 방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지부지됩니다. 냉전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연합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게 되고, 배상제로, 무배상 정책이 일본에게 적용되게 됩니다. 게다가,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당시 중국과 한반도의 양 정부를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연합군 측이나 미국에게는 미·일안보조약이 더 중요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배상금을 포기하는 대신, 미·일안보조약을 맺어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에 유지하는 비용으로 대체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사회에 아시아의 식민지 지배문제가 청산되지 못했고 현재까지 남게 된 것이지요.

조+이 : 한국전쟁과 냉전의 격화가 일본의 전후 국가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군요. 민족해방전쟁이니 혁명전쟁이라고 명분을 내걸었던 한국전쟁이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를 우익적으로 재편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질서의 변형적 재편, 일본 좌익의 퇴조 등을 촉진한 계기가 되었다고도 보이네요. 그렇다면 1965년 한일회담을 둘러싼 일본에서의 반대투쟁시기에는 왜 식민지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요?

우쓰미 : 한국전쟁 당시부터 미국은 일본에 한일조약체결을 위한 예비회담에 응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은 1951년 7월부터 미국의 주도에 의한 한일회담에 응하지만 조약은 14년 후인 1965년에 체결됨). 한편 이승만 정권은 일본을 경계하여 '이 라인'(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확정된 대일 군사경계선. 일명 평화라인, 65년 일한어업협정에 의해 이 라인이 폐지될 때까지 13년간 328척의 배, 3929명의 일본인 어부가 부산에 억류당함. 전후 일본의 반한(反漢) 이미지가 형성된 계기가 됨)을 확정하고, 경계선을 넘은 일본 어선들을 52년54년까지 부산에 억류하게 됩니다. 2000년대 밝혀진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 이전에, 50년대 중반 이승만 라인에 의한 일본 어선들의 납치의 기억을 일본사회는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 속에는 식민지 시대의 차별인식이 지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패전 직후, 독립국의 국민이 된 조선인들의 태도변화, 패닉 상태의 일본 사회 속에서 암시장을 통해 돈을 버는 모습들, 이 라인에 의해 어선이 납치되고 있다는 인식 등이 겹치면서 소위 '반한 감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청산되지 못한 아시아의 식민지 지배의 인식 위에, 이러한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의 반감이 중첩되어 뿌리 깊은 반(反)조선인식으로 강화되었고, 이런 현상은 특히 일반 서민들의 인식 속에 깊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정부에 의한 제도적 차별-국적박탈(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4월 19일 일본 정부는 국적 및 호적사무 취급의 방침을 발표하여 재일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킴. 독일이 자국 내 헝가리 및 폴란드인 등의 독일 국적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던 것과 달리 일본정부는 독립과 동시에 재일조선인 및 외국인의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하여 재일조선인들의 전후 보상 및 생활 조건을 제약함), 재류자격제한, 사회보험 가입 제한 등-이 강화 되었구요. 일본정부의 이러한 제도적 차별정책은 일본인의 의식 속에 식민지적 차별의식이 지속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 발생. 190만 명 피해, 10만여 명의 사망 및 행방불명, 당시 재일조선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十五円五十銭(십오원십오전, 쥬고엔고츄센(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의 발음을 시켜 발음이 안 되는 이들이 학살당함, 일본인의 조선인들에 대하 차별의식이 그 원인) 때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이라고 하는 것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서 촉발되었는데, 전후 일본정부는 그것에 대해 일절 반성하지 않았고, 청산하지도 못했습니다. 관동대지진은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제가 결혼한 후, 시어머니가 '조선인이 습격을 해서 도망 왔었다'는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은 '소문이었지 사실이 아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고 그때까지 그런 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을 정도이니까요. 1965년 한·일조약체결 당시에 일본의 조선 인식은 이러한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이 : 독일과 일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성이 있습니다만, '전쟁을 일으킨 양국에서 왜 이렇게 역사인식의 궤적이 다른가'하고 평소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만…

우쓰미 : 독일은 역시 유대인 학살이라는 문제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평화에 반하는 죄 및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요.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에 속하던 나라들이 전후에 유럽의 식민지 종주국 또는 새로운 지배세력에 맞서 새롭게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전쟁 책임이라던가, 점령에 대한 추궁을 개별 국가들이 주체적으로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또한 독일을 전쟁범죄를 재판한 뉴렌베르크 재판(1945년 11월 20일~46년 10월 1일까지 독일 뉴렌베르크에서 열린 독일의 전쟁범죄 재판)에 비해서, 동경재판은 미국의 강력한 헤게모니 속에서 진행됩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계획대로 진행된 재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편파적인 도쿄재판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지배문제가 직접 거론되지 않았다는 편파성의 문제는 지적하지 않습니다.

조+이 : 내부의 주체적 요인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라고 하는 외적 요인이 결합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청산이 되지 못했다는 설명이시군요. 일본공산당 등 내부의 주체적 역사 청산의 움직임은 없었는지요.

우쓰미 : 일본에서도 당시에는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전범추방운동을 합니다. 독자적으로 약 1000명 정도의 전범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GHQ(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일본이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의 집행을 위하여 일본에 점령정책을 실시한 연합국군의 기관.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 주둔군으로도 불림. 1945년 8월 14일 맥아더가 사령관에 취임. 대일평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소멸)가 이를 금지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자주적 및 민중재판을 지향했고, 미 군정청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지요.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진행되는 국제재판만을 그들은 인정했습니다. 이미 천황제를 유지하겠다고 하는 미국의 대일정책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점령 12년 후에는 미군정청이 스트라이크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음에도 일본과 똑같은 점령대상이 되었기에 점령방침에 반대되는 것은 불법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지요. '미국이 해방군이다'라는 것을 조선이 먼저 부정하게 되지만, 일본인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테라오 고로 등이 만든 일본조선연구소(1961년 설립)에 관여했는데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70년대 한일관계는 격동의 시대이기도 한데요.

우쓰미 : 일본인이 주체가 되어서 식민지 책임문제를 거론하게 되는 운동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과정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식민지주의를 거론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평화운동세력은 북일, 한일, 중일의 3국의 인민연대를 전면에 내걸었습니다. 이것이 60년대 후반의 움직임입니다.

제가 조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된 것은 70년대부터입니다. 일본조선연구소는 설립시기부터 몇 가지 단계적 발전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부락해방동맹(일본의 신분차별철폐운동. 부락은 천민의 집단촌으로 상징화됨. 부락운동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수평운동 등에서 출발하고 있음. 55년에 부락해방동맹을 결성, 60년대 말70년대 초 일본공산당계열이 이탈하여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를 결성)이 연구소를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락'에 대한 차별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연구소의 기관지는 '부락'이라는 용어 자체가 차별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사무실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 1935년89년, 도쿄 출신, 가나카와대 교수,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 근현대사학자)씨가 다시 기관지를 내고 연구소의 활동을 지속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그때 제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연구는 당시 일본의 교과서나 독본, 사전, 지도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조선에 대한 표기사항의 현황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조선인을 '선인(鮮人) 또는 제3 국민(전후 일본의 관공서 및 GHQ 등은 재일조선인 및 대만인을 비(非)일본인으로 구별하며 제3 국민으로 구별하였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국민이라는 의미로 일본사회에서는 차별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코지엔>(1955년부터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발행한 대표적인 일본의 국어사전)에서도 '선인(鮮人)'이라고 하면 '조선인의 약칭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차별적 기술(記述)을 찾아내어 변경시키는 활동을 했습니다(대한제국의 합병 이후 일본 내에서 한인, 한국인이 아닌 선인(鮮人)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식민지시대의 민족 차별어로 분류되고 있음).

일본 교재에는 차별적 표현이 많이 있었습니다. 헤본샤(平凡社, 1923년에 설립된 출판사로 주로 백과사전을 출판으로 유명함)가 발행하는 유명한 권위 있는 백과사전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표기하지 않고 '북선(北鮮)'이라고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바꾸는 작업이었지요. 이런 활동은 일본인의 식민지 인식을 교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본 사회는 선인이라는 표현을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가를 역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표현된 식민주의적 인식을 문제 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표현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었죠.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언어나 생활 속에서 내면화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사고를 일본 내부로부터 바꾸는 작업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큰 사무실이 아니어서, 다방에서 회의하기도 하고 집에서도 회의를 많이 했죠. 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집영사(集英社)>, <이와나미(岩波)>등의 유명출판사를 찾아다니며 교정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작업은 출입국사무소의 출입국과 관련된 규칙이나 령, 법을 개정하려고 활동했습니다. 70년대에 정부는 '출입국 관리법' 즉 입관법(入館法)을 개악하려고 했습니다(일본정부는 1951년에 출입국관리령을 제정하여 외국인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였으며, 70년대에는 범죄경력이 있는 외국인을 강제 추방하는 조항을 삽입하려고 했음. 주로 재일조선인 및 한국인 추방정책으로 이해되어 강력한 반대에 부딪힘). 이것을 분석하고, 이 법에 대한 반대운동을 했던 것이지요. 이 작업은 사회당과 함께 했습니다. 당시 도이다카코(여성최초의 중의원의장, 일본사회당위원장 역임)씨도 함께 했습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일본조선연구소는 그때부터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김대중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부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무국장인 사토 가츠미(니이가타 출신의 일본 공산당원. 재일조선인 귀국운동에도 적극참여. 1964년부터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원 활동. 70년대 반 북한인사로 전향. 1998년에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는 모임의 회장 역임)씨는 공산당원이었고, 니이가타에서 60년대 전개된 재일조선인의 북송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었습니다. 친북적 성향이었기에 당연히 한국 상황에는 무관심했었죠. 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바뀜에 따라, 일본조선연구소도 김대중 및 한국사회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일본의 진보적 학자나 단체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인식을 바꾸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사회운동이 과연 북한이 아니라 남한과 연대해야 하는가 하는 쟁점을 둘러싸고, 운동진영에서는 사토 가츠미 선생과 와다 하루키(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러시아 및 북한연구, 현 동경대 명예교수, 북일 국교 정상화 촉진국민협의회 사무국장) 선생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지무라 히데키 씨를 시작으로 연구소의 간판급 인사들도 사토 가츠미와 입장이 맞지 않아 다들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결국 그만두었고요, 1980년이었습니다. 결국 사토 사무국장 혼자만 남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후 '일본 조선 연구소'는 1984년에 '현대 코리아 연구소'로 바뀝니다. 사람도 바뀌고요. 지금은 조선 문제 관련해서 우익단체로 분류되는 전혀 다른 조직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발굴해 낸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

▲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이 2007년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으로 번역, 출판됐다. ⓒ동아시아
조+이
: 1982년에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을 냈습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져왔고, 특히 역사의 망각을 현재적 기억 속으로 재현해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연구만이 아니고 당사자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사죄 및 보상운동에 40여 년 이상 관여해 오셨구요. 1991년에는 '다타 요우코(26세에 요절한 인권변호사) 인권상'도 수상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우쓰미 : 먼저 일제가 태평양전쟁 기간 실시했던 포로감시원 제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은 1942년 2월 싱가포르, 3월 자바를 점령하고 식민지 병력을 포함해 25만~30만 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일본은 부족한 전투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2년 5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했습니다. 반강제적으로 지원한 조선인 약 3200여 명은 부산의 '노구치(野口)부대(육군 부산 서면 임시 군속교육대)'에서 2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 그해 8월 선박 편으로 3016명이 타이·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에 배치됐습니다.

종전 후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해 성공한 이가 있는 반면,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이 집행된 14명을 포함해 모두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조선인 BC급 전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장기형을 받은 전범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직전에 일본의 '스가모 프리즌(도쿄재판의 수형자들을 감금. A급 전범 7명의 형 집행이 이루어짐. 도쿄 시내의 이케부쿠로 근처)'로 이감돼 수감생활을 하다가 50년대 중반에 풀려난 뒤 '동진회(재일조선인 및 한국인 BC급 전범, 유가족 약 70여 명이 상호부조 및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라는 뜻으로 동진회를 결성. 동료 석방, 일본 정부의 사죄 및 보상을 촉구하기 위한 입법 활동, 유골 송환, 추모제 등을 해 옴. 회장 이학래 씨)'라는 상부상조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수감자 가운데 일부는 일본 정부의 냉대에 분격해 만기가 온 뒤에도 출소를 거부하며 항의하기도 했구요(19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 국적의 전범들을 석방하기 시작함. 조선인 BC급 전범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석방거부. 54년 이후 관계자들의 석방이 이루어지나 생활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석방된 2명이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 생활보장을 요구하는 석방거부투쟁이 일어남).

일본은 BC급 전범 기록들을 강제 동원사례로 문제가 될까봐 관련 자료를 거의 소각해버렸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BC급 전범 중에서 그 죄명이 해명이 안 된 경우가 많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BC급 전범을 재판했고, 그래서 일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네덜란드에도 기록이 있고요. 그런데 예를 들어 일본 측 BC급 전범을 재판한 25사단의 재판기록은 없습니다.

A급과 BC급 재판

'A급 전범'은 194648년, 연합국에 의한 극동 국제 군사재판(동경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를 물어 전쟁의 결정 및 수행을 직접 담당한 전쟁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재판은 연합국이 공동으로 주관하였고, 도죠 히데키(東条英機, 전시내각의 수상)등 28명이 기소돼 도중 병사 및 면책된 3명을 뺀 25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그중에서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BC급 전범'은 1945년 12월에 연합군 총사령부가 정한 재판 규정으로 A급 이외의 '통상의 전쟁범죄'로 기소된 사람들로 사실상 B와C의 구별은 사실상 없다. 194551년, 요코하마와 중국, 동남아시아에 각국 등 약 49개소에서 7개국이 독자적으로 법령을 만들어서 재판을 했다. 현지의 군사령관에서부터 하사관, 일반 병사, 통역 및 포로 감시원들인 군속에 이르기까지 약 5700명이 유죄를 받았고, 그중에서 984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50인이 감형돼 실제 사형자는 934명. 종신형 475명. 유기형 2944명. 그중에서 조선인은 148명(포로감시원은 129명)이 유죄가 되었고, 23명(동 14명)이 사형에 처했다. 대만인은 173명이 유죄가 되고, 26명이 사형을 받았다. 상관의 명령에 따를 뿐인 하급병사 및 군속들이 그 책임을 받아서 처형되었다. 1946년 중반까지 일본에서의 변호사파견도 인정받지 못했고, 통역도 부족한 상태의 재판이었다.

연합군은 태면 철도 건설 등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의 학대 및 사망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전후 전쟁 재판은 전쟁을 수행한 최고지도부와 포로를 직접적으로 학대한 말단 관리의 죄를 묻는 형태를 취하였다. 일본인 및 조선인 포로관리원 중에서는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한 구조상의 문제를 안은 채 사형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

조+이 : 조선인 BC급 전범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양칠성(19191949. 42년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배치. 종전 후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사망)'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 것 같습니다. 양칠성 씨는 선생님에 의해서 한국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지요.

우쓰미 : 일본조선연구소를 그만두고 197577년까지 저는 인도네시아 반둥에 있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에서 전공투가 끝난 시기였지요. 학생운동 세대 대부분이 실업자가 된 상태였는데, 저는 일본어 교사 자격증을 따 가지고 반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만나게 된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칠성 씨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했는데, 일본이 패전한 후, 식민지 종주국 네덜란드가 다시 영유권을 주장합니다. 인도네시아는 곧 새로운 독립전쟁을 시작하게 되고, 여기에는 일본인 병사들도 참여합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있었을 때가 1975년인데, 일본인 병사를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으로 새롭게 추도하는 기념식이 벌어졌습니다. 유골을 파내서 무명묘지에서 영웅묘지로 바꾸는 이장 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1943년생, 인도네시아 전공자. <새우와 일본인>으로 대표되는 여러 저작으로 글로벌리즘의 문제와 일본 및 선진국의 소비에 의한 가해자의 문제를 파헤침. 시민이 직접 조사하여 발표하는 시민 연구학의 기초를 형성. 현 와세다대학 교수)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무라이는 인도네시아가 전공이었고, 통역으로 이 행사에 참여했었던 것이지요. 그때 3명의 일본인이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는데, 2명은 일본의 유족에게 정식으로 연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에게는 일본 대사관이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다가 저희는 우연히 그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화를 냈지요. 그럼에도 왜 연락하지 않았는가하고요.

2년간 인도네시아 있는 동안에 이들 3명의 일본인 및 조선인 병사들과 빨치산 투쟁을 함께한 인도네시아 인들을 인터뷰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칠성 씨 등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한 일본군 내의 조선인 병사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행적을 더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니, 양칠성 씨만이 아니라, 그 부대 속에서만도 약 9명의 조선인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 이름을 안 것은 양칠성 씨 뿐이구요. 재일조선인의 <삼천리>라고 하는 잡지에 이것을 소개하는 글을 당시에 썼습니다. 그러던 중, 재일조선인 중에서 양칠성 씨 조카라는 분이 나타났고, 이후 여동생도 한국 전주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방문해서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조+이 : 양칠성 씨를 한국-인도네시아의 우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오늘날의 세계화 추세시대에 '국제주의적 연대'의 한 중요한 인물로 복원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우쓰미 : 한국인으로부터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조선인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학자는 양칠성 씨의 묘지를 자신이 발견했다고 하기도 하고, 글을 쓰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이제 관심을 가져주니 양칠성 문제는 그만해도 될 듯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양칠성 씨의 문제보다 제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와 함께 죽은 다른 9명의 동료들의 인적을 찾아서 그들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료를 찾다가 독립전쟁에서 죽은 분들의 본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분은 이름이 '아까기'인데, 그 일본 이름과 본적을 찾으면 현재의 집 주소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시민 국제적 연대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함께 찾아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려독립청년당 사건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

조+이 :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와 더불어 인도네시아에서의 고려독립청년당 사건에 대한 언급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군속으로 갔으나, 중국 공산주의 및 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반제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사건의 실체와 아직껏 명예회복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지요.

우쓰미 : 양칠성 씨에 대해 알아보고 있을 때, 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합군 포로감시원들이기도 했습니다. 자바 섬에는 1400명의 조선인 군속이 부산에서 파견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징병을 가지 않기 위해 군속을 지원한 사람도 있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 '이활'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우수한 훈련 성적으로 사무 일을 하였는데, 그는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군속에 지원했습니다. 중국에서 인도네시아의 남방지역으로 도망 온 경우였죠.

1944년 12월경이 되면, 일본은 전쟁에 질 것을 예상하고,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조선인 군속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상이 불온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훈련을 시켰는데, 이 중에 이활 씨와 이상문 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해 12월에 자바의 산속에서,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듭니다. 제 책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勁草書房, 1980년, 143페이지)에 실려 있는데요, 그 강령을 보면,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폭탄들이다. 만천하에 우리들의 의사를 알린다. 민족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그들은 일본병사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포로와 함께 뒤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자바에 상륙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배를 훔쳐서 도망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발견되어 대부분이 체포되었죠.

1945년 7월 21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군법정에서 10년의 형을 받습니다. 일본군 16군 소속이었습니다. 8월 15일 일본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옥에 있었으므로, 연합군에 의해서 바로 석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재인도네시아 조선인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그들을 석방시키고 인수자가 됩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이 겹쳐 직접 무력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일본에 대항하는 활동을 도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상문 선생은 광주에 거주 중인데 그분을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편지를 교환하고 작년에 다시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93세 정도 되셨는데, 지금도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시고, 고려독립청년당의 노래를 외워서 불러주시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유명잡지 <세까이>를 구독하고 있으며 매달 빠짐없이 기사를 체크하고 있을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조+이 : 한국에서 이 분은 독립운동 유공자로서 인정을 받으셨는지요? 참고로, 한국의 경우 보훈처에서 인정한 독립유공자 중에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민주정부 이후 조금씩 좌파 독립운동이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쓰미 : 이활 씨는 일종의 민족좌파였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이기도 했구요. 당원 중에서는 이후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결국 한국전쟁에서 사살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시대 시대의 반공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항일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대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위기감으로 당사자들이 모여서 기록을 해 오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그분들을 1978년에 만났을 때, 그런 자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바에 가서 추가로 조사하기도 했구요.

자바에는 양칠성 씨만이 아니라, 고려독립청년당 관계자, 실제 전범으로 재판받아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포로감시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려독립청년당에 관여한 이상문 선생은 한때 구례 군수를 역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일 정치조직 결성과 항일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5년 7월 일본군 16군의 군법회의가 있었기에, 당시의 재판장 그리고 일본 군재판 관계자를 찾아서 재판 정황에 대해서 증명을 해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당시 판사였던 오니쿠라 텐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천황에게 총을 겨누는 놈들을 위해서 증언할 수 없다"라면서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여기 오기 1주일 전에 일본 후생성에 있는 군법회의 자료실에 가서 관련 자료를 청구했었습니다. 하지만, 별 성과가 없었구요. 고려독립청년당 관련 자료를 찾으려고, 연합군의 일원이고 인도네시아의 BC급 전범문제의 재판을 담당한 네덜란드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만, 역시 성과가 없었구요.

후생성에서 복사해 온 16군의 참모장이 쓴 글을 보면, 군법회의 관련 전 기록을 소각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자료의 원본에 대해 복사신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확보가 되는 대로 이상문 선생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활'이라는 사람이 다른 전범에게 증언해주는 것은 네덜란드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미국의 군법회의 기록도 보았는데, BC급 전범의 재판 기록은 있으나, 45년 고려독립청년당에 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조+이 :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면, 우리가 항일운동을 생각할 때 한반도에서 직접적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활동만으로 제한해서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것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아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저항이 상호 연결되어 전개되었다는 사고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쓰미 : 예를 들어 동아시아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형태들은 달랐던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문제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지요. 이 전쟁의 결과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은 중국의 기존의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패권적 지배가 붕괴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구요. 러일전쟁의 경우, 비서구 국가가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서양을 이긴 사건이기도 했구요. 인도네시아인들도 매우 놀라워했으며, 고무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석유를 확보해야만 하는 일본으로서는 인도네시아에게 서구의 식민정책 및 점령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서구에 대항해서 일본과 함께 싸우자'라는 슬로건을 계속 보내고 있었습니다. 일본 당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점령은 침략이 아니고 서구세력에 대항하는 동반투쟁이라는 의식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도 유사한 의식구조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1941년 일본이 미영국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 일본은 서구의 식민지지배로부터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일본을 맹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구축을 모색. 1943년에 동경에서 대동아회의를 개최하고 대동아 공동선언이 채택되었음)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아시아 전쟁은 점령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이라는 담론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1942년 1월3월의 일본의 침공을 계기로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또 다른 점령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도네시아 인들조차도 초기에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초기에는 일본의 점령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으니까요. 네덜란드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곧 또 다른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본질은 금방 드러나게 되고, 1945년 초부터 일본의 점령에 대한 저항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북쪽의 버마에서도 일어납니다. 항일 반란들이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인도네시아 청년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훈련과 투쟁에 조선인 군속들이 관여하게 된 것은 전쟁 수행의 구조와도 연관이 됩니다.

일본인 지배자 밑에 조선인 군속이 있고, 그 밑에 인도네시아 보충병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 말단에서 그들이 함께 연합군의 포로를 감시하는 구조가 있었던 것이지요. 즉 조선인 군속들이 인도네시아 보충병을 직접 훈련시키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항일반란을 위한 조선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 간의 연대활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일본군의 포로정책> ⓒ조희연 이영채

조+이 : BC급 조선인 전범이 구조상 아시아 민중에 대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실제적인 물리적 가혹 행위를 했을 수 있겠습니다.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로만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네요. 그리고 또한 독일군이나 일본군 병사들이 '나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는 변론과는 어떻게 구별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구조와 한 인간의 선택행위의 모순의 문제가 대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우쓰민 선생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쓰미 : 저는 BC급 전범이 유죄라거나 무죄라는 결론으로 내리지는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왜 전쟁책임을 그들이 대부분 맡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인에게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권한과 자신의 주체적 판단의 여지가 가능했던 상황에 책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 전범의 경우는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에 불과했고, 감시원 148명 중에서 대부분인 129명이 전범이 되었습니다. 조선인 군속 수 총 3000명에서 보더라도 129명이 전범이 된 것이지요. 전범 비율이 과도하게 큰 것이지요. 일본군 어느 부대도 이런 과도한 전범비율을 가진 부대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일본군부의 포로에 대한 생각방식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쟁 수행시의 포로정책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포로감시원의 전쟁범죄 문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BC급 전범 문제를 일본군의 포로정책문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본군의 포로정책>이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포로감시원들이 전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스템이 존재했었다는 것이고, 그 모순을 파헤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합군이 지배했던 전범재판의 형식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간의 전쟁 및 그들의 현안 문제를, 예를 들면 식민지 출신자들에게 그 전쟁 책임을 뒤집어씌운 문제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론 포로를 때린 사람도 있고, 포로에게 미친 듯이 물리적 폭력을 직접 행사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의 포로정책과 서구의 전범재판 구조를 동시에 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인 전범 중에서도 포로수용소 관계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BC급 조선인 전범들에게 이중의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일본인으로서 집요하게 조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결국 일본은 조선인을 자신들을 대신하는 전범자로 만들었으면서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이들을 다 버렸다는 점입니다. 보상은커녕 이 문제 자체를 방치하고 내쳐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책임 포기와 회피를 일관되게 선언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인 전범들에게는 원호금이라는 보조금을 지불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피해자로 만든 조선인이나 대만인에게는 국적 박탈을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일본 사회에는 지금도 식민지 지배의 책임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추상적 지적만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BC급 조선인 전범들을 일본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가만 봐도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일본은 전혀 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인 BC급 전범문제

1942년 5월 일본 육군성은 포로의 경계, 관리를 위한 조선인, 대만인에 의한 특수부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움. 포로 수용 감시원의 모집을 신문 등을 통해서 선전하여 실시함. 대상은 20세35세. 2년 계약의 '군무원(군속)'신분. 명분은 지원제였지만, 관료 및 순사를 동원해 강제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한 곳이 많았고, 1개월 만에 한반도 각지에서 3000명 이상의 모집을 하였다.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에서 3223명이 2개월간 엄격한 군사교련을 받고, 후에 3016명이 인도네시아 등 남방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일본 육군성이 발표한 '포로 처리 요령'은 백인 포로를 사실상 노역에 동원하는 것으로, 도죠 히데키 육군대장은 "하루라도 무위도식을 시켜서는 안 된다"며 노동력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였다. 포로 감시원들에게 '제네바 조약'을 일절 가르쳐주지 않았고, 조약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

전쟁 상황이 불리해지고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 대량의 포로를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포로 감시원들은 폭력을 사용하였고 실제 연합군 포로의 다수가 기아 및 병으로 사망하였다. 종전 후 포로 감시원들이 전범으로 처벌받았으며 직접적인 명령을 내린 중간 간부의 죄보다 직접 폭력을 행사한 말단 관리병의 죄가 더 가혹히 처벌되는 것에 의해 많은 포로 감시원들이 전범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이 나왔다. 특히 재판은 피해자인 각국의 병사들이 귀국한 후 증언에 기초해서 가해자를 선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김 씨, 이 씨라는 동명이인이 전범으로 기소된 경우도 있었다.

한편, 조선인 BC급 전범의 경우, 2년 계약은 지켜지지 않은 채 일본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연장되었고, 일본의 포로학대 및 전쟁수행의 책임을 뒤집어쓴 형태의 처벌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대일강화조약 이후 일본인 전범에게는 원호금을 지불하였지만 조선인 전범들에게는 외국 국적을 이유로 지불하지 않은 차별을 받았으며, 한반도의 유족들은 부일협력자 및 전범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차별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사죄 및 보상을 하지 않았고, 강제동원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전범의 굴레를 써야만 하는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인 학대는 전범이 되고 조선인 학대는 전범이 되지 않는다?

조+이 : 포로감시원의 전범문제는 일반적인 문제로서 '전쟁에서의 포로의 인격적 대우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전쟁은 '증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포로 학대 문제보다도 '반공포로인가, 친공포로인가'의 이념이 우선시 되었던 것 같습니다. 친공포로의 인격은 말살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중에 대해 많은 학대행위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간의 극단적인 적대의 관계-그 극단적인 표현이 전쟁입니다만-에서 적대자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하는 인간론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우쓰미 : 맞습니다. 헤이그 조약을 만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포로에게도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지요. 포로의 인권 보장은 1925년 제네바 조약으로 성립합니다. 포로의 취급에 대한 규정을 국제사회가 만들어왔고, 일본도 이를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규정을 보니, 어떤 의미에서 일본군 병사 보다, 포로가 된 적군의 병사가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상황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의 중추 권력은 이 조약의 실천을 반대합니다.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도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을 준용(準用)하겠다는 주장을 합니다. 즉 연합국이 지키면 이쪽도 지키겠다는 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지요. 처음에는 지키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전쟁에 질 것 같으니, 일본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조약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식으로 대답하게 되고요. 그런 태도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대단히 화가 났지요. 전쟁 중에 실제로는 비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키지 않으니 일본에 대해서 이율배반적이라고 비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 한계도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생활 수준과 의식이 일본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 수준의 차이에 의해 조약에 따른 처우를 못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군수산업에 포로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포로 전체의 1/4이 강제노동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합국 사회에서 일본군의 포로 처우는 대단히 악명이 높았고, 그래서 분노를 증가시킨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김기성(본명은 홍기성)'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태국-버마(미얀마)간 철도(1942년, 버마 전선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이 태국에서부터 건설한 철도. 415km를 1년 4개월 동안 건설. 동남아시아의 노동자 및 연합군 포로가 대량 동원되었고, 가혹한 노동환경에 의해 다수의 피해자가 나왔음. 연합군 포로 6만여 명이 동원되어 1만2000여 명이 사망. 아시아의 노동자 약 17만 명이 동원되어 그중 약 8만 명이 사망하였다. 일명 죽음의 철도. 영화 <콰이어강의 다리>는 태면철도 건설의 일부 구간에서 연합군 포로들의 반란 및 구출문제를 다루고 있다)를 건설하는 공사를 관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공사에 연합군 포로가 동원되었죠. 전쟁범죄를 일으킨 사람은 사실 따로 있는데, 정작 무엇이 전쟁범죄가 되는가 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관련됩니다. 똑같은 외국인을 사용했는데, 여기 서구인 포로가 있고, 중국인이 있고, 조선인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학대를 당하더라도, 서구인 포로를 학대한 사람은 전범이 되었는데. 조선인이나 중국인 노동자를 학대했던 사람은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에게 책임을 지운 일본의 전쟁범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대면하게 됩니다. '누가, 무엇을 문제로 설정하고 범죄화 했는가' 하는 쟁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전쟁책임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범과 비전범이라는 기준만 가지고서는 본질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쟁책임이라는 그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전범재판은 쉽게 이야기하면 군사법정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무언가를 말할 수 있지만, 한국도 일본도 그렇지만, 사회의 인권 수준이 군대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전범을 생각할 때 이런 요소들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 자체도 이런 문제들을 배제하고 식민지배의 책임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일본 사회는 여전히 식민지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이 : 일본의 전쟁 책임과 그 이중성을 보면, 한국의 베트남전 학살문제와도 관련되는군요. 한국에서도 평화박물관운동 등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행한 양민학살에 대해서 한국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의가 있기도 합니다만,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쓰미 : 무엇보다 한국이 베트남과 화해를 해야 하는 과제가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군에게 베트남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그 속에서 병사들은 왜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는가'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구두조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병사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 등은 앞으로 시민사회가 진행해가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재판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문서 기록관에 학살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참고할 수 있겠지요. 베트남의 당사자의 피해의 기억도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북대립인 한국전쟁에서의 포로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조사들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문제만이 포로문제의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실 관계들을 더 밝혀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전쟁을 조사할 때, 베트남전쟁에서의 학살문제와의 연관관계를 조사하는 것은 빨치산에 대한 토벌의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학살의 상처가 당사자들에게 너무 크고 정치화되어 있으므로, 향후의 연구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피해자로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추궁할 때는 우리가 도덕적인 것 같지만, 우리의 가해적 측면을 문제 삼을 때 과연 우리가 일본보다 더 도덕적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베트남전은 한국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게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우쓰미 : 한국의 경우 남북분단이라는 제약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겠지요. 거기에 더하여, 군사독재정권의 제약이 있었고요. 그에 대항하여 민주화 투쟁을 해 왔는데 앞으로 어떤 과제를 중심으로 사회운동화 해 나갈 것인가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은 그동안 주변국의 전쟁, 배상 문제, 베트남 전쟁에의 일본 개입 등을 성장의 계기로 활용하여 왔습니다. 그 속에서도 일본은 피해자라는 사관을 계속 유지해 왔었지요. 그런데 아시아라는 것이 처음 보였던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무토 이치요우(일본공산당 출신, 대표적인 일본의 신좌익의 사상가, 베트남 반전 시민운동을 조직)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일본에서 쌀 알갱이가 긴 쌀이 배급된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베트남 '안남 쌀'이라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그것을 외국 쌀이라고 불렀고, '외국 쌀은 맛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 외국 쌀이 베트남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베트남 반전운동을 할 때 처음으로 베트남 쌀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후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게 되는데, '배상'이라는 이름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도 65년 이후 일본 기업들이 경제원조라는 이름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은 현금 대신 일본기업 물품을 현지에 사용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쟁 배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트남 반전 운동을 통해서 아시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면서 일본은 또 다시 기업을 통해서 가해자의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중요합니다. 한국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민주화 투쟁 속에서 과거사 청산을 했는데, 이것은 계속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주춤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일본 보다 빠른 속도로 과거청산을 해왔다고 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사회의 가해자 의식도 형성되어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이 : 말씀하신 대로 한국에서 과거 청산이 상당히 이루어진 면도 있지만, 사실 피해자적인 프레임 속에서의 진전이었다고 그 한계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가해자적 측면을 성찰하는 수준으로 가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구요. 이런 점에서 큰 전환, 프레임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구요.

우쓰미 :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이 있지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구조 속에서 예를 들면, 조선에게는 어떠한 역할이 맡겨졌는가. 일본 제국주의 구조에서 일본은 지배자이지만, 연합군의 측면에서 또는 아시아인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일본과 일체화된 가해자적 국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국주의 군대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일본군과 조선인 군대를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제국주의 군대 속에는 인도 군대도 영국 군대의 일부가 됩니다.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군대가 네덜란드의 제국주의 군대를 구성하는 도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재미 일본인도 미 제국주의 군대에 편입되어 독일 전선에서 많은 희생을 했구요. 결국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군대가 식민지 문제를 안고 수행 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조선의 입장은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의 입장을 가지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필리핀의 입장이 될 수도 있지요. 이런 식으로 종합적으로 사고할 때, 조선의 위치도 복합적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전쟁,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라고 말하는데, 전쟁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면 그런 복합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요.

저는 이 전범 문제가 왜 중요하냐 하면, 그런 복잡한 전쟁 속에 처해있는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복잡한 구조 속에서 복잡한 마음을 글을 쓰면서 표현하곤 합니다. 그런 복합적인 상황 묘사의 글들이 많이 소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입장이 서로 다르지만, 아시아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역사 인식의 새로운 시점들이 나오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이 : 조선인 BC급 전범문제는 한국사회의 친일파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과거 청산이 제기될 때 오히려 중간지대에 서 있었던 인사들이나 우익에서 역사를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한양대 임지현 교수 등이 사법적 과거 청산에 반대하면서 성찰적 과거청산을 요구하기도 했구요. 그 당시 민중은 친일적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돌을 쉽게 던질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복잡성을 고려할 때, 한국의 친일파 청산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우쓰미 : 예를 들면 그 시대를 산 사람은 다 친일일지도 모릅니다.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했구요. 모두가 전쟁의 협력자이기도 했지요. 이런 점은 일본에서도 전쟁책임을 이야기할 때 제기되는 쟁점입니다. 식민지 지배질서, 그리고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침략전쟁에 협력한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제기입니다. 일본 공산당의 중요인물들은 옥중에서 18년을 있었고, 그래서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은 감옥이 있었던 우리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조희연 이영채
하지만, 어떤 사회적 역할 들을 했는가를 보게 되면, 지위에 맞는 책임이라는 행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토 선생님의 경우, 그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세요. 그분은 만주국에서 유명한 정치가였습니다. 이 선생이 속해 있는 게이센대학교 이사장도 역임했고요. 하지만 전쟁 중,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의 단계를 지난 다음에 그 사람의 인생 드라마가 있습니다. 작가 이광수도 개인의 인생을 보게 되면 드라마틱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친일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길(金永吉), 즉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 19091985, 조선인 출신의 음악가. <애국행진곡> 등 전쟁 시기 유명한 일본 군대 음악을 작곡. 1960년에 북한으로 귀국하여 많은 조선인들의 귀국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귀국했고 북에서 죽었지요. 일본에서 유명한 작곡가인데,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을 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조선인 좌익조직에 들어갔고요. 그리고 북한으로 귀국했습니다.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요. 어느 한 지점만을 가지고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친일파라는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허영'(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19081952, 1941년 내선일체를 홍보하는 문예봉 주연의 <너와 나>를 연출,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냄. 일본 육군 및 조선 총독부 후원을 받아 친일영화제작)이라고 하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조선인 영화감독입니다. 연합군의 포로 학대에 대한 연합군의 비판이 강해지자, 일제 당국은 포로를 잘 대하고 있다는 선전 영화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제작한 것이 허영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 직후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들어갔습니다. 인도네시아인은 허 감독을 매우 잘 압니다. 인도네시아의 국립 시네마 테크에 가면 허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립을 도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허영 감독의 작품 중에 <너와 나>라는 식민지시기의 영화가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해서 조선인 자원병을 보내는 영화입니다. 허 감독은 인도네시아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만든 선전 영화가 <코린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포로영화입니다. 전쟁 후에 전범 재판에 서게 되고 제작과정에 대해서 추궁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의 독립군에 들어가 버리게 되고, 네덜란드하고 싸우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함께 싸우고, 인도네시아인의 영화를 만들기도 해서 인도네시아의 영화 산업의 기초를 만들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대표적 친일파이지요. 친일파 인명사전에도 실려 있고요. 그래서 친일파 문제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친일의 행위를 배제하고서 그 후의 그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조+이 : 전후보상운동에 대해 신자유주의 글로벌 시대 아직도 과거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하는 우익세력들이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 전후 보상운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쓰미 : 여전히 보상운동은 중요합니다. 전후에 일본 기업이 동남아시아 및 한국에도 진출을 하지요. 이러한 새로운 진출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문제가 촉발되면서 과거의 역사청산운동도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패전 후 철수해 역사는 묻혔지만, 일본기업이 재진출하면서 오히려 망각된 채 남아있던 현지의 역사적 사실이 쟁점화되고 재추궁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전후 보상이라고 하는 것은, 동경재판에서도 샌프란강화조약에서도 양국 간의 보상조약, 예를 들어 한일조약에서도 심의되지도 않았던 내용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80년대, 양심적인 시민들에 의해 가려져 있던 보상문제가 대두되었고, 전쟁책임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저도 그때부터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고요. 예를 들어 이상문 선생의 증언을 기록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던 역사적 진실을 피해자들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일본의 전쟁에 의해서 받은 피해에 대해서 전후 일체의 보상도 배상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들이 협력을 해서 일본 국가와 정부에 대해서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를 통해서 입법투쟁이 안되면 재판투쟁을 하게 됐구요.

1991년에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여성운동, 사회운동, 역사문제에 관계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후 전후보상 재판이 89건 정도 진행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모두가 패소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을 위한 원고가 만들어지고 증언들이 나오게 되었죠. 이것들이 일본에서 청산되지 못했던 식민지 지배, 조사하지 못했던 전쟁범죄들의 구체적인 기록들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배 확대라는 문제가 있지만, 아시아 교류협력이 늘어나고 밀접한 관계가 되면 일본 시민운동의 역사인식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 기록되고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놓으면 일본의 다음 세대들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학생이 낸 리포트를 봤는데 일본 학생은 '전후보상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구나. 우리의 젊은 연령층들은 교류를 하지만, 뿌리를 모르는 연약한 교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습니다. 한국 유학생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갔는데, 거기에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를 보았다, 거기에는 일본이 빨개져 있고 조선과 대만도 빨개져 있었다. 그 지도를 보고, 머리가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분노를 느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한 야스쿠니 신사의 체험을 한 여학생에게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비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고, '내가 관계하는 NGO 그룹들이 일본을 바꾸려고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도 보았다. 식민지 역사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다양한 단체 및 일본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일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고, 그런 사람들을 유학생이 만나게 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썼습니다.

민주당 집권 이후 일본의 과거 청산에 대한 평가

조+이 : 민주당의 칸 나오토 수상은 작년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과성명 발표 및 일부 도서의 반환 등 전격적인 조처를 한 바 있습니다. 이전 신문 인터뷰에서 '2009년에 정권교체가 되면(실제 하토야마 정부의 등장) 과거 청산에 대해서 일정한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2010년 4월 전후보상을 생각하는 '전후 보상문제를 고민하는 의원연맹'이 발족하기도 했고, 6월에는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억류자 보상을 위한 노력도 보입니다. 시베리아 억류자 중 한국인 피해자들을 명기하지 않은 점은 실망입니다만, 어떤 진전이 있다고 보십니까?

우쓰미 : 전후보상을 위한 포괄적 법안을 만들려고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는 극우세력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BC급 전범에 대한 보상법안을 만들려는 움직임과 위안부 법안을 만들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법안을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번 3·11 대재해가 일어났습니다. '동진회' 회장인 이학래(1925년 전남 보성출생.1 942년 태국 포로수용소에 배치. 태면철도 건설과정에서 포로 학대. 1947년 사형선고 후 25년 형으로 감형되어 태국 및 싱가폴 형무소를 거쳐 일본의 수가모프리슨에 수용. 1956년 10월에 석방. 현 동진회 회장) 씨는 86세인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명예회복을 요구하기 위해 매일 국회에 가고 있을 정도입니다. 만약에 이 BC급 조선인 전범에 대한 보상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포괄적인 전후보상법 안에 삽입하는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일본에서 운동하시는 분들은 2030년을 한 주제를 가지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 지구력이 참 강하다고 느껴지고, 한국의 운동이 이런 점은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90년대 초반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했을 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이전보다 진전된 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을 때 궁극적인 장벽은 일본 우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전쟁책임의 사죄와 배상 및 보상 등을 통한 과거청산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우익의 힘을 약화시켜가는 정치개혁운동의 성격도 있다고 보이는데요. 한국의 경우, 노무현 정부가 붕괴된 여러 주체적 요인이 있지만, 외적 요인으로는 타협 없는 과거 청산의 추진과 그것에 대한 우익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이었는데요.

우쓰미 : 우익과의 싸움은 우익의 논리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검증작업을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익과의 논쟁점 중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문제'가 있고 '9조 헌법 유지와 개정문제'가 있습니다. 우익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문제로 미국의 가해자성을 지적합니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왜 원폭투하가 있었으며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가라는 자기검증이 필요하겠지요.

우익의 역사 논리로 대표적인 것은 도쿄재판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들은 일본이 패전국이기 때문에 이렇게 굴욕을 당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계보는 의외로 친미파입니다. 일본에는 '도쿄재판 사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범을 재판했던 이른바 도쿄재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역으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역사가 바로 도쿄재판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무도 그 실체를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시민을 위한 도쿄재판 소개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어떤 것이 재판을 받았고, 어떤 것은 재판을 받지 않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익정치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역사적 지식과 정보를 모아서 그것을 공개하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후보상운동은 지식인, 연구자, 역사학자들이 활동가들 및 시민들과 공동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우익과 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학자들입니다. 일본에는 '터부(taboo, 금기(禁忌))'라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천황제이고, 또 하나는 조선 문제입니다. 우익은 이 두 가지에 민감하지요. 우익과의 논쟁은 그들의 형식적이고 왜곡적인 주장에 대해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근거를 들이댈 필요가 있습니다.

조+이 : 한류의 부상은 한일 간의 역사인식의 민감한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데요. 조선 문제가 터부시 되어왔던 것을 고려하면 한류의 부상은 놀라운 변화라고도 보입니다만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쓰미 :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게도 과거에 비하면 한국에 대한 위화감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물론 더욱 나빠졌고요. 한국에 대해서는 이미지 향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전에 '일평(一兵)', 즉 '잇페이(いっぺい)'라고 하면 발음이 좋게 들리지 않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배용준(ペ・ヨンジュン)'의 '페' 발음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꼭 역사문제에 대해서 바람직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 자체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고요. 제가 잘 다니는 미용실의 아주머니도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합니다. 집 주변에 큰 절이 있는데 스님도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나서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주변에 찻집이 있는데 한국어를 배우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무조건 한국어를 좋아하고, 한국말을 하고자 하지요. 한류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식민지 및 역사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일본에서는 산케이 재단인 <후지> 방송은 우익방송으로 구별되는데도 한국 드라마를 많이 방송합니다. 우파가 친한파가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혐한류(일본에서 한류의 유행에 반대하는 문화차별의 움직임. 작가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은 만화 <혐한류> 1,2,3,4권을 통해 한국사회의 문화를 혐오하고, 노골적으로 비판. <혐중국>과 더불어 외국 문화 배척의 중심적인 흐름)의 경향도 나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조+이 : 한류가 일본 사회나 아시아에 진보적 효과를 동반하도록 하는 매개적인 노력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만에 체재하고 있을 때, 진보적 다큐멘터리를 <한류>라는 이름으로 상연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용산 참사, 송두율 사건을 다룬 <경계도시2> 등을 상연했는데 영상을 통해서 철거민의 문제, 반공 냉전적 사고 등에 대해서 토론하는 기회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화 산업자본이 주도하는 이러한 한류를 정치적으로 진보화하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우쓰미 :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하면 할수록 좋은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한류하고는 다르지만, 작년에 한국 강제병합 100년과 관련해서 <NHK>에서 식민지 시기의 프로그램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한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해석하기는 좀 어렵지만요.

당사자와 지원자의 관계

조+이 : BC급 전범, 특히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 출신의 전범의 경우 미시적 차원에서는 가해자일 수 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동원된 피해자라고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발굴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 전범문제를 다루는 것은 통상 우익의 주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또한 실제 지원하는 조선인 BC급 전범들 개개인의 가해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우쓰미 : 구술조사도 하고 개별적인 지원운동도 많이 해 왔지만, 당사자와 지원자의 관계, 즉 BC급 조선인 전범과 저와 같은 지원자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전범을 지원하는 것은 대개 우익의 분야라는 인식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구술조사를 할 때도 그들이 가해자적인 측면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편견을 가질 때도 있었습니다. 당사자와 지원자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해설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제3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구하고 역사 속의 그것의 위치를 매기는 작업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조사지침에 해당하는 핸드북을 만들기도 했구요. 실천적 측면에서는 변호사들이 이를 이해하고 재판으로 연결해주었습니다. 당사자들이 말하는 것을 100%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100% 지원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이 있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자료에 기반을 둬서 설명을 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학래 씨와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당사자와 지원자와의 관계는 대립하고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매번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나 지원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피해자가 100% 맞는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예컨대 재일조선인 1세의 남성은 여성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여성차별과 관련해서는 재일조선인 1세의 그러한 차별적 자세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그래서 싸우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들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사회를 바꾸어가는 것이 우리의 지원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해 오신 분들도 오랫동안 운동과 연구를 동시에 해 왔으며, 당사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일본정부와 일본정부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해 왔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일본인의 역사인식으로 주체적으로 바꾸어나가는 운동이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바꾸어 가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운동이지만, 그들을 통해 일본사회의 성찰적 개혁을 하는 운동이 전후보상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이 : 일본에서 전쟁책임, 식민지 지배 및 보상 등 과거 청산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일반 국민들의 보수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의 '국익에 반하는 운동'을 해 나가는 정의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청산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가주의일 것입니다. 가해자의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성찰하기가 쉬운데, 오히려 한국처럼 피해자로서 식민지의 저항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스스로 성찰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족주의는 저항이자 식민지로부터 혹은 약자로부터 벗어나는 긍정적인 집단적 수단이었기 때문이지요. 일본 진보세력이 하는 일장기과 기미가요에 대한 성찰을 보면서 '우리가 태극기를 거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보수세력과 동일하게 태극기를 보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것을 아직도 폐기하지 못한 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한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우쓰미 : 한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강렬하다는 것을 우리들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와 국기가 상징하는 의미는 일본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에서 국기와 국가는 항일과 반일의 상징이었지요. 저항적인 의미로서의 국가와 국기는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분단 속에서 바라보는 국기와 국가의 의미는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기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많이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수준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기업은 동일하게 인도네시아에서 착취기업에 속합니다. 경제적 침략의 측면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의 한국기업의 국가와 국기는 경제적 착취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태극기의 의미를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여 다시 사회운동 속에서 재해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일장기에 대한 반대는 말 그대로 시민운동의 저항의 첫걸음입니다(1999년 8월 13일 일본정부는 국기 및 국가에 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함. 기미가요와 히노마루가 공립학교의 입학식 및 졸업식에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교원 및 학부모들의 항의 행동이 이어짐. 불(不) 기립 교원에 대한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처벌 및 부당노동행위가 이어지고 있음. 교장의 기립요구에 불(不) 기립으로 응한 교원들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근거로 헌법위반을 제소하였으나 2007년 최고재판소는 교사들의 패소를 결정. 헌법합치를 인정하는 부당판결을 함) 우익은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강하게 주장하지요. 글로벌리즘과 민족주의는 역설적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글로벌리즘이 강화될수록 민족주의가 오히려 강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의 강렬한 민족주의, 태극기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비극은 국가나 국기에 그러한 저항이 현재에 와서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그동안도 많은 조사와 연구를 해오셨는데, 앞으로 어떤 주제를 연구하고 싶으신지요. 쉬셔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우쓰미 : 저는 앞으로 10권의 연구 저서를 더 쓰고 싶습니다. 급하게 써야 하는 것이 현재 2권이나 있고요. 일제하의 조선에서 특별고등형사를 하고 있었던 어떤 사람이 박정희 시대에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을 고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 특별형사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했던 고문방식과 너무나 동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북한지역의 북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통일되면 북쪽에 가서 자신들이 자행했던 고문을 사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넘겨받았고요. 먼저는 이 문제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또 하나는 일본인들이 전쟁 전에 이미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돈을 벌려고 나갔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써 보고자 합니다. 또한 전범들의 증언집도 만들고 싶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에 대해서 그 의미를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A급, BC급 전범들은 전후 수가모프리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학래 씨 등도 수가모에 있으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형무소 안에서 반성의 글을 많이 썼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 정부는 일본군인 및 일본 전범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연금이나 막대한 보상을 해주었는데, 한국과 대만인은 이 보상대상에서 배제했습니다. 이런 일본의 정책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꼭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BC급 전범들의 목소리가 한국사회에 잘 전달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이 : 남로당 등 빨치산 투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사라져간 이들의 운명과 삶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쓰미 : 남한의 빨치산 투쟁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정보도 없었고, 직접 관여했던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재일조선인 운동과 관련하여 '고준석(조선의 혁명가. 남로당에서 탈당 후 북한의 노선을 받아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가족들은 서울에서 학살당함. <아리랑 고개의 여인>을 통해 가족사를 서술)'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일본에 밀항한 '김시종(1929년생, 재일조선인시인, 문학가. 제주 4.3사건 이후 일본으로 밀항하여 공산당활동.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재일조선인들의 저항투쟁인 수이타 지역의 철도역 점거사건에 참가. 1986년 <재일의 협간에서(在日」のはざまで)>라는 책으로 마이니치출판문학상을 받는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제주도로부터 밀항해 온 '윤학준'이라는 분도 있고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남한의 빨치산 운동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일본으로 밀항한 그들을 우리가 지원하기도 했지요. 그러한 과정에서 남로당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요.

저는 어쨌든 접근방법이 구체적인 개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작은 곳에서 세계를 생각하고 있지요. 세계 혁명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미시적인 개인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인생 및 삶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조+이 : 선생님의 연구는 현대적인 이론의 맥락에서 보면 본질주의를 극복하려는 지적 논의들과도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좌파적인 논의의 흐름 속에서 예컨대 노동자를 노동자계급이라는 거대담론으로 접근하는 것과 개개인의 노동자의 삶으로 접근하는 것의 문제와도 연관되는 것 같은데요.

우쓰미 : 우리도 한때는 마르크스주의로 운동했던 사람입니다. '마르크스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전제로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한때는 학생 때 그런 운동을 했던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년, 진보적인 소설가 및 방송작가, 친일본 공산당 작가라는 평을 받음)'라는 평화운동가의 <1주일 간>(주인공의 청년은 일본공산당 활동 후 체포되어 전향함.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종전 후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 억류. 그곳에서 우연히 레닌의 마지막 유언의 편지를 손에 넣게 되고 편지를 찾는 소련공산당 간부들에 대항하여 일본 군포로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소설인데 그것을 보면,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스탈린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및 구조의 문제도 있겠지만, 저는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개개의 삶을 다루고자 합니다. 시베리아에 억류된 조선 사람들의 모임인 '삭풍회(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보내진 뒤 한국으로 돌아온 조선인 병사들의 모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억류자는 몇만 명이 있었는데, 500명만 살아서 돌아오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민주당은 지난번에 시베리아 억류자인 일본인 병사 보상법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 안에 국적 조항을 넣었고, 조선인 출신들로 구성된 '삭풍회'는 배제했습니다.

저는 행동하는 지성에도 관심이 있지만, 무엇보다 역사 속의 한 개인에게 관심이 있고, 인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아시아 공통의 인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조+이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 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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